(41)‘어머니는 아들이 어찌될까 부친의 항일운동을 숨겼다’
(41)‘어머니는 아들이 어찌될까 부친의 항일운동을 숨겼다’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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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걸, 탐라 성주·고봉례의 父…민란 진압, 왜구 제주 침략 방어 ‘큰 공’
고여림, 고려 무신…삼별초 전투로 전사
고연홍, 광주 3·1만세운동 주동
고영기, 편집국장 지낸 언론인이자 시인…제주도문화상 예술부문 수상
항몽유적 순의비 모습. 순의비는 삼별초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이다.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항몽유적 순의비 모습. 순의비는 삼별초군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비석이다.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고신걸高臣傑생몰년 미상, 고려 우왕 때 탐라의 성주.

초명은 보개寶開, 성주星主 고순원高順元의 아들, 호는 청파靑坡, 1369(공민왕18)에 문과에 급제하고 서도부천호西道副千戶를 거쳤다.

고신걸은 1372(공양왕21) 3월에 유경원劉景元을 간선어마사揀選御馬使로 삼아 탐라에 와서 징마徵馬하고자 하니, 목호牧胡(원의 관원)들이 불복하며 유경원과 목사 이용장李用藏 등을 죽였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1374(공민왕23) 8월에 최영崔瑩 장군으로 하여금 목호를 토벌하게 했다.

이때 목호의 세력이 없어진 후 목마 관리상 공백기를 틈타 토적土賊 차현유車玄有가 마필을 훔쳤다.

이어 1375(우왕1) 11, 제주인 차현유는 난민을 움직여 관사를 불을 지르고 안무사 임완林完과 목사 박윤청朴允淸·마축사馬畜使 김계생金桂生을 죽이는 민란을 일으켰다.

이에 고신걸은 왕자 문신보文臣輔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괴수 차현유를 죽이고 이를 평정시켰다.

1376년 왜구들이 600여 척으로 제주에 침입, 전도에 돌아다니며 노략질하니 그는 이들을 물리치고 제주 방어에 헌신했다.

이때에 탐라 성주로서 진두지휘하던 중 적의 화살을 맞아 부상당하면서도 왜구를 격퇴시켰다. 이 승첩이 고려 조정에 알려져 호조전서戶曹典書가 특별히 내려졌다.

1384(우왕10) 성주작星主爵을 이어받아 동년 7, 고려 조정의 하사품인 자포紫袍·보개寶蓋·궁시弓矢·표리表裏 등을 받았다.

1386(우왕12) 7, 고려는 전의부정典醫副正 이행李行과 대호군大護軍 진여의陳汝義를 탐라에 보내어 말을 조공하게 하는 한편 탐라의 모반을 방지하기 위해 성주의 아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익년 4, 성주인 그는 아들 봉례鳳禮를 데리고 들어가니 고려에 충성을 바치는 일을 한층 더하도록 했다.

이때에 고려 조정에서 호조전서戶曹典書를 내린다든가, 하사품을 보내준 데 대하여 아들 봉례와 함께 고려 왕경에 이르러 답례를 올린 것이다.

 

토성의 모습. 토성은 삼별초군의 거점지인 항파두리에 흙을 쌓아 만든 길이 3.87km의 성이다. 원종 때의 무신 고여림은 김수의 뒤를 이어 마지막 근거지인 제주도에 들어가 방어했다. 고여림은 삼별초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토성의 모습. 토성은 삼별초군의 거점지인 항파두리에 흙을 쌓아 만든 길이 3.87km의 성이다. 원종 때의 무신 고여림은 김수의 뒤를 이어 마지막 근거지인 제주도에 들어가 방어했다. 고여림은 삼별초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사진=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고여림高汝霖?~1270(원종11), 고려 원종 때의 무신.

1268년 야별초夜別抄지유로서 일찍이 김준金俊의 휘하에 있었으나, 임연林衍이 김준을 죽일 때 김준의 편에서 방어하지는 않았다.

1270년 고려가 몽고와 강화하여 수도를 강화에서 개경開京으로 옮기고 삼별초三別抄가 강화에서 진도로 근거지를 옮겨가면서 대몽항전對蒙抗戰을 계속하자 정부의 명으로 그 해 8, 양동무楊東茂와 더불어 수군을 거느리고 진도 섬을 쳤다.

그 결과 제주도가 삼별초의 마지막 근거지가 되었다.

그러나 삼별초에 의해 오히려 장흥부長興府의 관군 20여 인이 죽고 재물과 곡식을 탈취 당하였다.

같은 해 11, 여몽麗蒙연합군의 치열한 공격으로 진도마저 함락되어 삼별초가 제주도로 들어갈 때 장군으로서 병력 7천 명을 이끌고 전라도 영광부사靈光副使 김수金須의 뒤를 이어 제주도에 들어가 방어했다. 그러나 삼별초의 공격으로 전사했다.

고연홍高蓮紅()1903(광무7)~?, 독립운동가. 기미독립운동 당시 광주에서 항일활동. 본관은 제주, 제주면 상천동上天洞 태생으로 당시 광주군 효천孝泉면 양림楊林리에 살고 있던 여학생이었다.

1919년 독립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때 동년 310일 전라남도 광주에서는 최한영崔漢泳 등 기독교인과 수피아여학교·광주농업학교 학생 등 5천여 명이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고연홍은 독립선언서 등의 독립의 취지를 기재한 격문, 독립가 등 태극기 한가마를 광주생도들에게 배포했다.

일제는 주동자 76명을 체포, 1919430일 광주지법에서 소위 조선형사령을 적용, 보안법 위반으로 고연홍은 징역 4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이때 기소된 76명 중에 제주 출신으로는 학생 고연홍과 일반인 박재하朴宰夏가 있다.

이날은 광주의 장날인데 오후 3시 반경에 일반 군중과 학생들이 의거義擧를 일으켜 숭일학교 학생 수 10명과 수피아여학교 여학생 20여 명이 앞장서자 군중 1천여 명이 시위에 합세, 대한 독립만세를 고창했다.

고영기高永璂 : (1935~2006), 언론인, 시인, 소설가.

제주도 한림읍 귀덕리<복덕->에서 태어나 제주대학 영문과를 졸업, 와 소설小說로 문단에 데뷔, 주로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제주일보 편집국장編輯局長, 논설주간論說主幹을 지내고 한국문인협의회 제주도지부장, 한국예총 제주도지부장, 제주문화예술재단 이사장 등을 거쳤다.

시집詩集으로 해녀의 겨울’, ‘먼 기다림 속에서’, ‘그는 언제 오나등이 있고 산문집 , , 바람, 파도가 있다.

제주도문화상(예술부문)을 수상했다.

필자의 변 : 1930년대 초에 제주농업중학교의 학생 항일운동이 일어나 고영기 시인의 부친 고경수高京守 등은 징역 10월에 집행 유예 4년을 받았다.

그의 집안 내력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차에 50여년 지나 그(고영기)가 제주일보 편집국장 당시 나의 글 제주 항일학생 운동을 읽고 고경수는 나의 선친이라는 것이다.

떳떳한 일을 하였으되 어머니나 어느 누구도 이 일을 숨기고 있었던 것을 동창의 글로서 비로소 자기도 알았다는 것이다.

당시 교장의 황민화皇民化정책에 대항하고 경찰에 끌려가 당한 얘기를 알면 어린 아들이 어찌 될까! 걱정이 태산이었으니.

그는 자라서 1947년 그의 선친이 다녔던 제주농업학교에 입학해 4년 동안 나의 동기동창, 제삿날도 아버지 죽음에 대해 말을 해 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런 예는 중문리에서도 고부이씨 집안에 있었다.

이는 법정사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옥사했어도 전혀 알리지 않았다. 그때까지 사교집단의 행동이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역사적 독립운동, 곧 기미 3·1운동에 앞서 일어난 뜻에서 무오戊午법정사 항일운동이란 글로 비로소 세상에 알려져 해당자들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

일제 당국이 얼마나 당시 언론을 통해 체제 유지에 오도誤導했는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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