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두 번 아내를 잃고, 김만일 딸과 혼인한 이익의 손자
(81)두 번 아내를 잃고, 김만일 딸과 혼인한 이익의 손자
  • 제주신보
  • 승인 2018.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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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옹 이익, 훈학 열중하며 ‘명도암 선생’ 김진용 등 훌륭한 후학 양성
‘경주김씨’ 셋째 부인으로 맞아…인조반정 후 복권돼 처자식 두고 떠나
제주시 오라동에 있는 제주 유배인 ‘간옹 이익’의 측실인 경주김씨의 무덤. 경주김씨는 헌마공신 김만일의 큰딸이다.
제주시 오라동에 있었던 제주 유배인 ‘간옹 이익’의 부인 경주김씨의 무덤. 경주김씨는 헌마공신 김만일의 딸이다.

삶을 새롭게 보게 하는 죽음

무소유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 법정스님의 이야기는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체제와 배치되는 말이다.

소비를 위해 생산이 존재하는 사회, 결국 소수가 모든 것을 독점해 지배하는 사회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사회라면 그것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사람들은 생산에서의 소외를 제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 소외는 다시 소비에서의 소외를 부르기 때문이다.

생산자로 참여해야 소비자가 될 수 있으므로, 결국 생산에서의 소외(실업)는 실질적으로 자신의 생존을 위협받는 것과 같다. 생존권의 위협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기는 것이다.

삶을 위한 욕구의 필요(need)는 절실하다. 최소한 살아갈 수 있는 조건에서 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노동을 선택하지만 우리 사회는 그 노동의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아 큰 문제다. 인간의 기본적인 노동의 기회를 빼앗기고 소비만 종용하는 사회, 소비는 상품으로 유혹하고, 그 유혹을 뿌리칠 수 없는 시장경제는 기본적인 생산과 소비체계를 무너뜨린다.

생산품도 상품이 되는 순간 경쟁이 발생한다. 이 경쟁은 죽음의 경쟁이다. 상품에 못 미치는 생산품은 굶는 사람의 눈앞에 있어도 폐기 처분해야 하는 운명을 겪는다. 비상품이기 때문이다. 이런 비정한 자본주의 상품 경쟁은 피라미드 꼭짓점을 향해 죽음의 행진을 계속한다.

쌀을 포함한 식량이 바로 그런 꼴이다. 자신의 땅에서 생산되는 멀쩡한 식량 생산 체계를 무너뜨리고, 질 나쁜 수입쌀을 들여온다. 중세 사회도 아닌데 21세기에 가난한 사람이 더욱 늘어나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팔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까닭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삶은 무엇일까. 노동자이자 소비자로서 살아가는 삶이다. 필요한 것을 구매하기 위해서 노동을 파는 삶을 넘어설 수가 없는 삶. 시민들은 이미 시장에 편입된 지 된 지 오래며 신상품 유혹의 대상일 뿐이다. 더 많은 신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삶을 원하며 경쟁하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상품을 구입하지 못하는 삶은 쓰레기 취급되는 삶이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시민이 서민에 해당한다. 서민이 되지 않기 위해 잠을 쫓으며 과거를 준비했다. 현재의 입시 열풍이 조선시대 복사판과 비슷하지만, 요즈음 어머니들이 입시를 담당하는 것과 달리 그때에는 아버지가 자식의 걱정을 더했다. 대를 잇고 가문의 영광을 안겨줄 메이커를 만드는 일이었기에 어머니 보다 아버지가 직접 관여했던 것이다.

절집은 고시원처럼 과거 준비생들로 북적거렸다. 아비 된 사람은 편지로 아들에게 종이와 먹을 아껴 써라”, “조그만 참고 기운을 내라”, “올해의 과거 정보는 이렇다”, “추위에 감기 조심하라는 등 부단히 신경을 썼다.

왜 그랬을까. 신분사회에서 서민의 삶이 고달프다는 것, 사회의 주류, 양반으로 살라는 염원 때문이었다.

오늘의 사회는 그 신분이 돈으로 대체되었으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과거 급제는 평생 자신의 삶을 보장해주는 보증수표다.

사람들은 무덤을 보면 부질없고 허망한 생각이 들 것이다. 특히 한 평도 안 되는 공동묘지의 무덤을 보면, “내가 왜 이렇게 살았을까?”라는 자책이 들기도 한다.

현재 자신의 모습을 위해 인생길을 달려온 것을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할 수도 있다.

또 가까운 누군가가 영면(永眠) 하게 되면 인생에 대해 깊이 생각하기도 한다. 그때부터 죽음을 다시 생각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때부터 조정에 전마를 바친 김만일은 제주의 말 부자였다. 사진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중 말을 점검하는 모습.
임진왜란 때부터 조정에 전마를 바친 김만일은 제주의 말 부자였다. 사진은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중 말을 점검하는 모습.

눈을 편하게 못 감는 것은 어떤 절실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기고 갈 것이 없는 사람은 떠나는 것도 수월하다.

불가(佛家)의 말대로 보시(普施) 할 것 없는 사람이 가장 깨끗하게 산 사람이라는 역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많은 재물을 어떤 식으로든 취했다는 것이 된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의 가슴을 아프게 했거나 누를 끼쳤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남을 위해 내놓을 수 없는 상태, 깨끗한 삶이다. 이때 그런 사람의 죽음은 아름답다고 표현할 수 있다.

죽음은 삶을 새롭게 완성하는 의미가 들어있다. 어느 날 찾아온 죽음. 모든 존재에게 찾아 올 죽음,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 진행형의 정지 상태. 죽음은 미지의 세계라는 이데올로기가 공포를 몰고 오면서, 그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내세에 천당과 극락을 마련한다.

그러나 죽음에는 미래가 없다. 죽음에 미래를 부여하는 것은 산 사람들의 소망이자 환상에 불과하다. 우리들이 무덤을 만드는 것도 바로 산사람들이 기억을 공표(公表) 하는 것이고, 그의 인생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적 장식에 불과하다. 그런 점에서 무덤은 이데올로기 국가기구(Ideology State Apparatus)의 산물이며, 무덤은 당대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산하는 수단이 된다. 그러나 무덤의 그런 기능에도 불구하고 무덤은 사람들을 겸허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무덤을 통해 삶을 새롭게 자각할 수 있으니 존재를 변화시키는 능력도 함께 갖춘 것이다. 무덤 앞에서는 어떤 감정이든지 느낄 수 있다. 무덤을 보면서 인생무상, 허무, 고독, 아쉬움, 그리움, 공포, 삶에의 의지(意志), 새로운 각성(覺醒) 등 바쁜 삶의 와중에서 쉽게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정서를 얻을 수 있다.

무덤에서 배우는 사회·문화사

이윤(李火允·1650~1708)은 조선 숙종 때 무신으로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명(汝明)이다. 1618(광해군 10) 제주에 유배 온 간옹(艮翁) 이익(李瀷·1579~1624)의 손자이다.

이윤의 조부 이익은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죽음만은 면하고 제주에 유배된 인물이다. 이익은 5년의 제주 유배 기간에 훈학(訓學)에 열중하여 전적(典籍) 고홍진(高弘進)뿐만 아니라 명도암 선생으로 알려진 참봉(參奉) 김진용(金晋鎔) 등 훌륭한 제주 출신 문하생을 배출했다. 이익의 유배 전 벼슬은 정언(성균관의 정5품 벼슬)이었다.

이익의 첫 부인은 후사(後嗣) 없이 사망했고, 재취(再娶)로 평산 신씨(平山申氏)를 맞았다. 평산 신씨는 현감 길원(吉元)의 딸이다.

이 평산 신씨 또한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두 자녀를 남기고 이익의 유배 직전 타계했다.

이익은 제주에 유배 오기 위해 5살 난 딸을 형 이탁(李濯)에게 맡기고, 12살 아들 인실(仁實)만을 유배지 제주에 데리고 왔다. 이후 제주 유배지에서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의 딸 경주김씨(慶州金氏·1596~1666)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경주김씨는 평산 신씨가 낳은 인실(仁實)을 키우면서, 아들 인제(仁濟)를 낳았다. 16233월 이익은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복권되면서 같은 해 51일 제주를 떠났다. 제주를 떠날 때 경주 김씨와 당시 3살 된 둘째 아들 인제(仁濟)는 남겨 두고, 장남 인실만을 데리고 갔다. 이익과 함께 떠난 평산 신씨 소생의 인실은 어릴 때부터 영특해 유배지에서 아버지 이익에게 경사(經史)를 다 배웠고, 제주에서 육지로 돌아와서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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