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개헌논의와 남북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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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국제관계학부 특임교수

지난 5월 3일은 현행일본헌법이 시행된 지 71년째가 되는 ‘헌법기념일’이다. 이맘때가 되면 헌법 개정의 찬반을 둘러싼 집회나 보도가 요란스러워진다. 일본 패망 후 GHQ(연합국최고사령부)점령 하에서 제정된 일본헌법은 항구적 평화와 국제분쟁 해결 수단으로서의 전쟁 포기를 담았다. 일본헌법의 평화주의 규정은 두 차례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은 국제사회의 심심한 반성을 담은 세계사적인 보편성을 지닌 규정이라 하겠다.

하지만 일본헌법이 GHQ에 의해 강요된 헌법이라는 반발도 적지 않았다. 헌법 제정을 주도했던 미국 자신이 동북아 냉전체제가 심화되는 가운데 헌법 개정을 요구하게 된다. 강화조약(1952년)을 전후해서 집권한 요시다 시게루는 자위대의 창설(1954년)등 미국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으나 경(輕)무장·경제 중시 노선을 추구하면서 개헌에는 적극적이지 않았다. 1954년 말에 개헌을 공약한 하토야마 이치로 내각이 들어서면서 개헌 논의가 활발해지고 이어서 집권한 키시 노부스케는 미일안보조약의 개정과 더불어 해외파병도 가능한 군사대국화의 길로 나갔다.

일본의 군사대국화 시도는 전후 최대 규모의 국민운동으로 전개된 ‘안보투쟁’(1960년)에 밀려 실현되지 않았다. 키시 퇴진 후에 집권한 이케다 하야토는 헌법 ‘준수’를 강조했고 전후 최장정권을 이룩한 사토 에이사쿠(1964년∼72년)는 ‘새 헌법’은 이제 ‘국민의 혈육’이 됐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개헌 논의도 주춤해졌다.

일본에서 개헌논의가 부활되는 것은 냉전체제 붕괴 이후의 일이다. 더구나 개헌의 기치를 내세운 아베 신조가 초기 집권의 좌절을 무릅쓰고 재차 집권(2012년∼)한 후에는 개헌 논의가 급물살을 타게 된다.

2013년 NHK 여론조사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이 42%를 기록하고 호헌파(護憲派)는 16%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해외파병을 가능케 하는 ‘안보법제’ 제정(2015년 9월)에 이어 2016년 총선에서 참의원도 개헌세력이 개헌 발의에 필요한 3분의 2를 넘기면서 개헌 논의는 위험 수위에 달했다. 작년 70주년 헌법 기념일, 아베수상은 드디어 헌법에 자위대를 명기한 개헌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이후 1년이 지나 개헌을 둘러싼 일본 사회의 기류는 크게 변했다. 모리토모(森友)·가케(加計) 스캔들이 잇따르며 ‘정치권 전반의 개헌 기운은 냉각’(아사히신문 5월 2일)돼 가고 있다. 내각 지지율은 30%대 초반까지 급락하면서 4월의 NHK 여론 조사에서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29%에 불과했다.

한반도 남북화해의 극적인 진전도 그러한 기류 변화에 한몫을 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두드러진 일본 사회의 보수화·우경화 요인의 하나가 북한의 지속적인 핵·미사일 개발에 있었던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작년 5월 일본의 해상자위대가 ‘안보법제’에 의거해서 미군의 보급함 방어에 나섰을 때 영국의 BBC는 ‘안보법제’는 ‘사실상 헌법을 무시하고 자위대는 동맹국을 지킬 수 있게 됐다’고 하면서 ‘북한의 위협이 증대되는 것은 아베에게 유익하다’고 분석했다(BBC NEWS 1 May 2017). 남북화해와 동북아의 평화 정착이 그동안의 일본 사회의 보수화·우경화의 제동이 될 것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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