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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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경 수필가

언젠가 한 번은 꼭 와 보고 싶었던 곳, 칠갑산 자락에 위치한 청양 장곡사 마당에는 홍색의 꽃이 나를 반기는 듯 환하게 피어있다. 이 세상에 장곡사가 존재하는지 처음 알았을 때부터 남아있던 그리움의 장소이다.

배롱나무는 꽃이 지는가 싶어도 촘촘히 새 꽃 순이 다시 올라와 백 일 동안 연이어 피고 진다하여 백일홍이라고도 한다. 가지를 손으로 가만가만 쓰다듬으면 주름진 꽃잎이 사르르 몸을 떤다. 내 손이 닿는 순간 뿌리에서 시작된 수액이 꽃잎 끝까지 바로 전달된 듯이 감응한다. 그와 동시에 내 마음도 미세하게 떨리면서 사십여 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절, 고등학교 일학년 때 국어 선생님은 산문을 한 편씩 써 오라고 숙제를 내 주셨다. 그것으로 작문 시험을 대신한다고 하셨다. 다음 시간에 내 작품을 읽어주시며 ‘이 학생은 나뭇잎의 뒷면과 숨은 얼굴을 볼 줄 아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칭찬을 해주셨다. 그 후부터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무엇이든 진지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아득하면서도 기억이 생생히 떠오른다. 선생님은 항상 팔짱을 끼고 계셨기 때문에 어떤 아이들은 잘난 척하며 우리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며 불평을 했다. 하지만 나는 선생님의 굳게 다문 입매에서 무언가 남다른 것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꽃이 만개하던 어느 봄날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장곡사 얘기를 꺼내셨다. 학창시절 건강이 좋지 않아 장곡사에서 일 년을 보낸 적이 있다고 하시며 “대웅전이 두 개 있는 유일한 곳이니 나중에 꼭 가보세요”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얼마쯤 지나 선생님의 배가 조금씩 불러오자 “부인 대신 애를 낳을 건가봐”하며 철없이 놀리는 아이들도 있었다. 부은 듯한 얼굴에 팔짱을 끼고 수업을 했지만 항상 열성적이셔서 우리의 작문실력은 날로 늘었다. 재미있는 말씀은 별로 없어도 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 가슴으로 들어와 뿌리를 내리고 내밀하게 터를 잡았다. 그 당시 내가 무엇이 그리 특별했을까만은, 선생님은 내가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 보셨던 모양이다. 연극 ‘파우스트’를 보여주고 책도 선물하며 글 쓰는 재미를 알게 해 주신 분이다. 짧은 교직 생활이었지만 몇 십 년이 지난 후에도 당신을 기억하고 있는 제자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실까.

 

그 뒤 선생님은 장기휴직을 하셨다. 그 때서야 팔짱을 낀 것이 간경변으로 복수가 차올라 가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철없던 시절에 저질렀던 잘못에 대한 후회와 이미 늦어버렸다는 당혹감으로 한순간 눈앞이 아득해졌다. 선생님은 매 시간 이 수업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시며 가르치셨겠지. 선생님의 부재가 주는 적막함을 간직한 채 시간이 흘러 바쁜 3학년이 되었고 반년쯤 지나 한 살 된 딸을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해에 내가 산문부 장원을 했기에 조사를 쓰게 되었고 학교장을 치르는 가을 운동장에는 구노의 ‘아베마리아’가 낮게 흘렀다. 우리와 보낸 시간이 선생님의 남은 목숨 한줄기였다는 생각 때문에 얼마 동안은 ‘아베마리아’를 평정심을 가지고 들을 수 없었다.

 

서른을 조금 넘긴 한 사람의 인생을 잡아채는 죽음을 보며 나는 오래도록 죽음이란 실체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죽음은 남은 사람들의 가슴에 슬픔으로만 남지는 않는다. 슬픔을 넘어선 책임과 사랑이 남은 자들을 이끌어 가리라.

 

장곡사를 찾아와 배롱나무와 마주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선생님이 살았던 그 때도 이 붉은 꽃이 피어있었겠지. 말할 수 없이 먹먹해져 절 마당을 둘러보았다.

그 시절에는 시간이 너무 더디 가서 어서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순간이 지나면 그 때 만났던 사람들과도 이별할 수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세상 이치가 그렇듯이 한 번 떠나면 다시 올 수 없는 먼 길이지만, 누군가 오래 기억해주는 이가 있다면 덧없이 살다간 것은 아닐 것이다.

 

따뜻한 햇살 아래 작은 새들이 배롱나무 주변을 날아다닌다. 꽃 위로 오래 전 선생님의 팔짱 낀 모습이 겹쳐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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