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八, 봉축 부처님 오신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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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허자, 광주대각사 주지/제주퇴허자명상원장

음력 사월초파일은 ‘부처님 오신날’로 해마다 전국 각지 사찰에서 석가모니의 탄신을 봉축하는 연등행사를 대대적으로 치른다. 연등행사의 역사는 불교가 왕성했던 삼국시대 그 중에서도 신라 때부터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온 우리 민족의 세시풍습이었다. 특히 연등회는 신라 경문왕6년(866)정월 보름에 왕이 흥룡사에서 간등(看燈)하고 백관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신라본기(新羅本紀) 등에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시행할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오늘날과 같은 사월초파일 연등회는 1167년(의종 21년)부터이다.

조선왕조는 불교를 탄압하였으므로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불교의례가 축소되거나 철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불교는 신라로부터 고려를 거쳐 이미 백성들의 종교로 뿌리를 깊게 내려 그리 쉽게 혁파하지 못하였다. 불교 배척은 신흥유학자들의 주장이었을 뿐, 현실적으로는 궁궐에 ‘내불당’을 두는 등 예불을 온전히 단절시키지 못했다. 연등풍속이 얼마나 뿌리깊은 민속으로 자리 잡고 있었는지 연산군이 관등한 기록을 봐도 잘 알 수 있다. “왕이 미복으로 잠행하여 경회루에 올라 만세산을 배설하고 관등하였다. 잔치 후에 승정원으로 하여금 들어와 보게 하였는데 밤 2경이었다.” 이처럼 초파일 연등행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 문화요, 전통으로 오랜 동안 자리를 지켜온 것이 사실이다.

나는 감히 말한다. 앞으로도 초파일 연등행사는 오랜 전통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다만 우리가 꼭 알아두고 챙겨야 할 것은 초파일에 왜 등불을 밝혀야 하는 것인지 그 의미이다.

첫째 부처님 당시 ‘빈자의 등불’처럼 비록 가난한 자의 정성스런 등불로서 새벽녘까지 꺼지지 않았던 그 믿음, 곧 신앙의 등불이어야 한다. 둘째 우리 마음의 어둠(무명우치)을 밝히는 지혜광명, 곧 깨달음의 등불이어야 한다. 셋째 어려운 이들과 함께하는 자비보시의 등불이어야 하며, 넷째 우리민족의 염원인 남북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등불을 밝히자는 것 등이다.

불교,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깨달음’이다. 하지만 깨닫고 실천하지 않으면 ‘도로아미타불~’ 아무런 쓸모가 없다. 3000년 전 인도 카필라국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태어난 고오타마 싣달타 태자가 29세에 출가하여 히말라야 우루빌라 숲속에서 설산수도 6년을 거쳐 깨달음을 얻어 80세 열반에 드실 때까지 오직 중생교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것만큼 우리도 부처님처럼 사회에 환원하는 ‘깨달음의 사회화’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많은 종교가 있지만 종교들 간에도 서로 화합하여 상대의 종교를 서로 존중하는 화쟁(和諍)의 정신이 필요하다. 나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지난 24년간을 매년 크리스마스 무렵이면 ‘예수님의 탄신을 경하드립니다’는 현수막을 걸어왔고, 24일 저녁에는 성당으로, 25일에는 교회 성탄축하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여 종교간의 화합을 다져왔다. 진정한 종교인이라면 성철 큰스님의 “법당에서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예배당에서 목탁소리 나온다.”는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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