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우리 부부의 마지막 희망은 다시 북한으로 가는 것”
(42)“우리 부부의 마지막 희망은 다시 북한으로 가는 것”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05.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영수, ‘미국의 소리’ 몰래 청취…김운제 등 체포돼 소련 망명 계획 들통
고용숙, 김정은 母 고용희 동생…美 망명
고영은, 市의회 부의장 등 역임
고영일, 제남신문 주필 등 지내
고영호, 오사카서 조선독립청년단 결성

고영수高榮洙1926(일제강점기)~1949(분단시대), 제주 무선 통신소에서 단파短波방송 미국의 소리청취에 따른 항일활동.

고재길高在吉의 차남으로 산북 삼도리<무근->에서 태어났다.

1945517일 청진지방법원에 의해 김운제, 김귀석은 각각 징역 3년을, 김상희는 징역 2년을, 윤중선은 징역 16월을, 고영수는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실은 무선기사 오기윤吳基允(23·성내)을 찾아갔다. 오기윤이 단파 라디오의 다이얼을 맞춘 곳이 놀랍게도 미국의 소리방송, 마침 이승만李承晩 박사의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육성 방송이었다. “나는 이승만입네다. 나 이승만은 국내외에 살고 있는 2300만 동포에게 말합네다. 어디서든지 듣는 이는 자세히 들으시오. 들으면 아시려니와 내가 말하려는 것은 제일 중요하고 제일 기쁜 소리입네다. 자세히 들으시어 다른 동포에게 일일이 전하시오.”라는 독특한 말투였다.

이를 듣고 함북으로 건너가 두만강을 넘어 소련 땅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기로 하여 김운제와 김귀석은 장도에 올랐다.

나머지 고영수高榮洙(20·삼도), 김용수金瑢洙(20·삼도), 윤한구尹漢求(20·성내) 등은 김상희 안내로 동년 1022일 수신소의 뒷 담벽을 넘었고, 몰래 오기윤의 도움으로 대망의 미국의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이 무렵 두만강을 건너려던 김운제와 김귀석은 청진淸津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어 단파 방송 청취로 망명하려던 내용이 노출되었다.

1개월 남짓 혹독한 고문과 조사 끝에 고영수, 김상희 등 12명이 청주로 압송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아 이 사건의 전모가 밝혀졌다.

고용숙高容淑()생몰년 미상, 재일교포, 조천읍 북촌리 유도선수 고경택의 딸, 미국에 망명,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高容姬의 동생.

고용숙은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의 동생으로 김정은의 스위스 유학시절 뒷바라지를 했던 인물이다. 지난 1998년 고씨 부부는 김정일 정권의 비밀을 너무 많이 알아 겁난다면서 미국에 망명해 뉴욕 근교에 살고 있다.

고씨는 1996년부터 2년간 스위스에서 후견인 자격으로 김정은을 돌봤을 당시에 대해선 평범한 삶을 살게 해주고 싶어서 케이크를 먹이고 레고 장난감을 사줬다면서 김정은과 그의 형 김정철에게 친구들을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자주 말하곤 했다고 했다.

그는 김정은이 농구광이었다면서 키가 작았던 그는 어머니로부터 농구를 배우면 키가 클 것이란 말을 듣고 잠들 때도 농구공을 안고 잤다고도 했다.

고씨는 미국 망명 이유에 대해선 김정은의 생모인 고용희는 말기암을 앓고 있었고 북한정권과 나와의 연결고리가 느슨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떠날 것을 결심했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방문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 고영호가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할 무렵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으로 고등 경찰이 해체됐다. 연합뉴스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을 방문한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 고영호가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할 무렵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으로 고등 경찰이 해체됐다. 연합뉴스

고씨 부부는 1998년 미국에 온 이후 세탁소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았다. CIA로부터 받은 정착 자금 20만달러로 뉴욕 근교에 2층집을 구입했다. 집 안 곳곳에는 김정은의 어릴 적 사진 등이 걸려 있었다.

고씨 남편 리강은 우리 부부는 아메리칸 드림을 일궜다면서 최근 휴가는 라스베이거스로 갔다 왔고 2년 전에는 즐겨보던 한국드라마에 자주 등장하는 경복궁을 보기 위해 한국 여행도 갔었다고 했다. 그는 우리 부부의 마지막 희망은 다시 북한으로 가는 것이라면서 우리는 미국과 북한에 대해 모두 잘 알고 있고 양자 간 협상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내가 아는 김정은이라면 만나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조선일보, 2016.5.28>

고영은高永銀1922(일제강점기)~1986, 의사, 제주시의회 부의장. 제주시 일도1두목-에서 고인준高仁俊과 양성옥梁成玉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세에 선친을 잃고서, 제주북교를 졸업, 간신히 전남도립 제주의원 고원으로 취직한 뒤에 주경야독의 생활 속에 살았다. 19455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에서 시행한 의사醫師 검정시험檢定試驗에 합격, 24세의 청년의사가 외과의外科醫의 의술을 습득했다.

해방 후 194712월 미군정청美軍政廳에서 시행한 제주도립 제주의원 외과과장의 발령을 받았다. 이듬해 1월에 오창흔吳昶昕의 후생厚生병원에 자리를 옮겼다. 19503월에 스스로 병원을 개업했다.

1956년 실시한 제주시의회 의원議員에 출마하여 당선되고 부의장副議長에 선출됐다. 1971년부터 약 5년간 고량부高梁夫 삼성재단三姓財團 이사장을 맡았다. 부인 김을원金乙媛 사이 6남매를 두고 있다.

 

고영일

고영일高瀛一1926~?. 사진작가, 언론인. 제주성안에서 태어나 혜화惠化전문 국문과를 졸업했고, 제주신문 편집국장, 제남신문 주필 등을 역임했다.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카메라 교실’, ‘작품사진으로 본 사진사등이 있다.

고영호高瀛豪1920(일제강점기)~2004,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비밀결사 조선독립청년단 단원으로 활동. 19457월 말일에 만기 출옥되어 조국의 해방을 맞았다.

고영호는 한림읍 한림리<-수풀>에서 제주목 주사 고성현高成鉉3남으로 태어났고, 세 살 때 부친을 여의였다. 19432월 고베시<神戶市>의 윤씨댁에서 동지들과 활동 상황을 협의하였다. 교포의 밀고로 탄로되어 전원 구속, 그는 이때 도쿄<東京>에서 메이지<明治>대학에 재학 중이었다.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6개월을 언도받았다. 1934년 구우舊右공립보통학교(현 한림교)에 입학한 후 6학년 때 일본인 교장 나카야마<中山重義>가 조선어 사용 억제 방침을 강화하자 이에 격분하여 항의하자 정학 처분을 받을 직전에 이르러 맏형이 사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19424월 중학교 동기 동창 윤병윤尹炳允, 한종치韓宗治, 정진환鄭鎭煥, 하백문河伯文, 이행철 외 수명이 오사카시 히가시나리쿠<東成區> 오이마리<大今里> 177번지에서 비밀히 모여 나라를 되찾기로 서약한 뒤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하였다.

세상이 뒤바뀌어 동년 10월초 오사카 지방 공회당에서 열린 한민족 궐기 대회에 참석, 지금껏 느껴보지 못한 환희를 느꼈다. 이 대회를 이끌었던 인사가 바로 제주 출신 독립운동가 송성철宋性徹이었다.

이 무렵 미국 점령군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으로 치안유지법은 폐지되고 지긋지긋하던 고등 경찰도 해체되었다.

그는 메이지대학에 복학해 학업에 몰입한 뒤 1947년 봄 졸업하였다. 19506·25 전쟁으로 서울의 가옥과 영업소마저 전소, 그뿐인가 전란의 와중에 유탄을 맞아 파편이 뼈에 박히는 수난을 당했다. 서너 해 못 보던 송성철이 서울로 내려와 찾아온 것이 아닌가! 벌써 조선인민공화국의 핵심부에서 활동하던 중 서울이 인민군에 떨어지자 곧 남하하여 찾아와 이제 독립 운동은 달성되었으니 통일 운동에 뛰어달라고 조르는 것이 아닌가! 장고 끝에 그의 간청을 정중히 물리쳤다.

그대로 도일하여 파편도 빼고 병도 완쾌하여 도쿄 아라가와쿠<荒川區> 닛보리<日幕里>에서 평화화공주식회사의 상무를 거쳐 신광상사新光商社 전무로 오래 일하다가 따스한 고향을 찾아 1984년 영구 귀국 길에 올랐다.

고영호는 199012월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