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아! 슬프다, 李별장이 갔구나…제주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82)“아! 슬프다, 李별장이 갔구나…제주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
  • 제주신보
  • 승인 2018.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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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 청렴한 성품으로 주변서 칭송 자자
김춘택 문하서 수학…유배인에 베풂 실천
묘는 부인 고씨와 함께 월라봉에 조성돼
서귀포시 신효동 월라봉 남쪽 정상에 있는 이윤 무덤의 전경. 혈을 달리해 부인 고씨의 무덤이 가까이 있다.
서귀포시 신효동 월라봉 남쪽 정상에 있는 이윤 무덤의 전경. 혈을 달리해 부인 고씨의 무덤이 가까이 있다.

무사들에게 칭송받은 이윤

제주에 남겨진 이익의 아들 이인제(李仁濟)는 두 아들과 딸을 낳았는데, 장남은 윤이고, 차남은 찬()이다.

이윤(1650~1708)은 젊어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혀 1680년 봄, 어사 이증(李增)이 실시한 무과에 급제해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 제주에 돌아왔다. 훈련원 판관을 지내는 동안 진보(鎭堡)의 조방장(助防將)이 되었고, 만년에 임시로 행수(行首)들을 인솔하기도 했다. 그의 성품은 침착하고 굳세며 언제나 청렴하고 곧았다. 일을 행할 때 몸가짐이 바르고 반드시 의로운 것을 취하여 구차함이 없었다.

이윤은 숙종비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오빠인 김진구(金鎭龜)가 제주에 유배되어 가락천변에 살 때 가깝게 알고 지내 아침 일찍 제일 먼저 김진구를 문안하는 등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때 김진구의 아들 김춘택과도 가까웠고 후일 김춘택이 유배살이 때 산지천변의 집주인이기도 했다. 이 인연으로 이윤의 아들 중발(重發)과 중무(重武)는 고만첨, 오정빈, 김덕항 등과 함께 김춘택의 아버지 김진구에게 배울 수 있었고, 당대 최고 문장가의 한 사람이었던 김춘택의 문하에서 수학할 수 있었다.

김춘택(金春澤·1670~1717)의 호는 북헌(北軒), 그는 처음 아버지 김진구를 모시기 위해 유배지에 따라와 제주에 체류했고, 두 번째 제주행은 1706년 유생 임보(林溥)의 상소로 인해 1706년부터 1711년까지 제주에서 유배살이를 했다. 김춘택은 숙종비였던 자신의 고모가, 왕비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민비(閔妃)가 그 뒤를 이었으나 후사가 없었고, 그 이유를 들어 장희빈이 민비를 폐비시키자 그것에 반대하여 민비 복위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장희빈의 미움을 샀기 때문에 유배되었다. 이후 김춘택의 가계는 바람 잘 날 없이 온 가족이 당쟁에 휘말려 불행한 수모를 당했다.

김춘택은 제주에 유배와 집을 세 번 옮겼는데, 처음 아버지 김진구가 살던 집에 거주하다 산지천변에 있는 이윤의 집에 살았다. 다시 남문 청풍대(淸風臺) 옆으로 거처를 옮겼다. 제주도 유배 기간은 약 6년인데 이때 많은 글을 지을 수 있었다.

김춘택의 시() ‘이주인궤이제여(李主人餽以祭餘)’는 이윤이 제사 음식을 나눠준 고마움을 그리고 있어 이윤이 유배인들을 어떻게 대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이주인궤이제여(李主人餽以祭餘)’

계림(慶州) 이군은 명가의 후손(鷄林李君名家孫)/예법에 의지해 부지런히 부모 제사를 모시네(禮法尤勤祭父母)/매번 제사에 올린 음식 유배객에게 주니(每將祭餘餽遷客)/어려운 때 한번 뜻하지 않게 잘 먹었네(窮途一飽良非偶). -김익수 역

170876일 마침내 이윤이 병으로 사망하니 제주 삼읍(三邑)의 무사(武士)들이 달려와서 술잔을 올리고 곡()을 하며 상례(喪禮)를 드렸다.

이런 일은 전에 없던 일이었다. 제주의 남녀노소들이 이윤의 성품은 아름답다고 하였는데 이들이 말하기를 이별장(李別將)이 죽었으니 제주에는 그런 사람이 없다.”라고 할 정도였다.

이윤은 평소에 덕을 숭상하고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여 제주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다.

아들 중발은 김춘택에게 아버지의 묘지명(墓誌銘)을 부탁하자 의리상 거부할 수 없었고, 김춘택 자신도 스스로 이윤에게 조의(弔意)를 표하기 위해 만사(輓辭) 5()를 지었다.

이윤 무덤의 문인석.
이윤 무덤의 문인석.

월라봉의 이윤 무덤

이윤의 묘는 신효동 월라봉 남쪽 정상에 있고 주위는 과수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이윤의 무덤은 넓은 평지 한가운데 있고 혈()을 달리해 부인 고씨(高氏)의 무덤이 가까이 있다.

자연석에 가까운 귀부(龜趺) 위에 원수형(圓首形) 비신에는 조선국 훈련원 판관 이윤지 묘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세월이 지나면서 비문이 마모되자 병인년에 바로 무덤 왼편에 오석의 비석에 현곡(玄谷) 양중해 선생이 다시 병인년(再丙寅·1986) 9월에 비문을 썼다.

상석은 자연스럽게 다듬은 현무암이다.

망주석은 종형(鐘形)인데 팔각형 처리도 간단한 시늉만 내었다. 문인석은 18세기 제주에서 유행하던 양식으로 1기는 키가 호리호리하고, 1기는 조금 둔탁하게 만들어졌다. 주로 얼굴 표현에만 신경을 쓴 탓에 손은 뭉툭하고 복대와 공복(公服)의 소매 처리는 큰 선으로만 처리했다.

동자석은 매우 천진한 표정을 가졌다.

어설픈 형식이 주는 친근감이라고 할까. 얼굴 부분만 둥근 면이고 몸체는 각진 형태로 만들어졌다. 별다른 기교를 부리지 못하는 석공의 솜씨는 그야말로 순진무구한 어린이 솜씨에 견줄만하다.

제주도 석상은 투박하면서 아담하여 친근감을 더욱 느끼게 한다.

이익의 장남쌓은 덕이 후했다

이익은 청빈하게 살다가 1675(숙종 1) 5, 4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충북 음성군 감곡면 문촌리 산 80번지 자좌오향(子坐午向)에 묻혔다.

이익의 장남 인실(1620~1669)18세가 되던 해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여 묘살이로 예를 다하였다.

1633(인조 11) 인실은 진사시에 합격했지만, 얼마 없어 병자호란(16361228~1637228)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낙향해 은둔하다가 1652년 천거를 받아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 신창 현감(新昌縣監), 장례원 사평(掌隷院'c9�� 등을 역임했다. 만년에 익위사 사어(翊衛司司禦)에 제수되었다가 오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왔다. 이인실의 부인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경주 김씨인데 엄격하고 법도가 있었고, 각종 전적(典籍)도 알았다고 한다. 경주 김씨는 이인실보다 먼저 별세하여 공이 서거 후에 부장(附葬) 되었다.

이인실의 묘표는 송시열의 문하였다가 후에 아버지 윤선거(尹宣擧·1610~1669) 문제로 서로 대립되었던 소론의 영수 명재(明齋) 윤증(尹拯·1629~1714)이 지었다.

이인실의 아들 정()이 상복(喪服) 차림으로 먼 길을 와 윤증에게 묘표를 지어 달라 부탁했기 때문이다.

이인실은 윤선거와 과거에 동방입격(同榜入格)한 사이였고, ()은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의 문하에서 배웠기에 거절할 사이가 아니었다.

윤증이 평한 이인실

, 공은 명망 있는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굳은 지조와 훌륭한 행실을 쌓았고 외적인 화려함과 내적인 질박함을 동시에 갖추었다. 따라서 높은 자리에서 세상에 이름을 날렸어야 마땅하거늘 보잘 것 없는 관직을 전전하면서 궁핍하게 세상을 마쳤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분수에 만족하여 자신의 지조를 지켜서 외부에서 부여된 관직에 따라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남들은 공의 불운을 한탄하였으나 자신은 그러한 상황을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니, 공은 타고난 복은 박하지만 쌓은 덕은 후한 사람이라 하겠다. 공의 가르침에 따라 열심히 공부하고 가문을 계승하여 공이 받지 못한 복을 받을 사람은 아마도 후손들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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