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후(邂逅)
해후(邂逅)
  • 제주신보
  • 승인 2018.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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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윤 수필가

230여 년 만의 만남이었다.

어제부터 쉼 없이 비가 온다. 물 도둑이란 생소한 단어를 듣게 한 가뭄은 해갈되어 농부들의 근심을 덜어주었지만, 이묘(移墓)를 생각하니 큰 걱정이다. 새벽 세 시 가로등 불빛을 튀기며 줄기차게 내리는 비를 바라본다. 일기예보대로 아침에 개이면 이장이 수월할 것 같다. 다행히 묘지로 출발할 무렵 풍향이 바뀌고 비가 그쳤다.

일출시간 638. 창조주께 기도드리고 할아버지 묘를 파기 시작했다. 유골은 순조롭게 수습되었다. 할아버지를 칠성판에 모시고 할머니 계신 곳으로 옮겼다. 친영례(親迎禮)를 치르기 위해 신부를 기다리는 신랑처럼 과수원 길에서 할머니를 기다렸다.

이 산을 쓰고 산담 허잰 허난 보리쏠 여러 가마를 삶았을 거우다.”

일꾼들이 땀을 닦으며 하는 말이다. 50여 평 터에 커다란 봉분, 어른들도 넘기 힘든 높은 산담. 밀감 밭 가운데 있어서 퇴비와 농약 냄새가 코를 찌르고, 사방의 비닐하우스로 더위까지 익어 벌초하기도 힘겨워하는 묘다.

스무 살 남편을 앞세우고 젖먹이 외아들을 하늘로 여기며 질경이 같은 삶을 살다 간 탐라인 양씨할머니를 모신 곳이다. 유학(儒學)을 공부하여 문묘의 제사를 받들던 교생(校生) 남편이라, ()도 다 주고받기 전에 이승을 떴기에 눈물과 한이 세월까지도 삭게 하였을 것이다. 벌초를 마치고 땀을 식히노라면 홀어머니의 한스러운 세월만큼 봉분을 높이고, 버거운 삶의 고갯길을 넘었을 날을 헤아리며 산담을 올렸을 외아들의 사모곡(思母曲)이 들리는 것 같았다.

일꾼들이 묘를 파고 또 판다. ‘세월이 오래 흐른 묘는 이장하지 마라, 현재 묘지보다 열 배 이상 좋은 자리를 얻지 못하면 이장하지 말라는 풍수 격언이 떠오른다. 풍수지리를 믿지는 않지만, 몰랐더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 것 같았다.

밤새 비는 내렸지만 봉분 겉만 젖어 있다. 굴착기가 접근할 수 없어 인력으로 작업할 수밖에 없다. 일꾼 두 명이 힘을 보탠 지 서너 시간이 지났을 무렵, 썩은 나무 조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개판(蓋板)이었다. 황토색 찰흙을 파내고 개판 주위의 검회색 찰흙을 긁어내자 물기가 보인다. 장의사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굳어진다.

고무장갑 잇수까, 긴 고무장갑 마씨, 물그릇도 찾아봅서.”

일순간 불안함과 안타까움, 그리고 걱정으로 싸늘한 바람이 스쳐간다. 생생한 느티나무 널이 보인다. 조심스럽게 관 뚜껑을 열자 유리같이 투명한 물속에 뼈들이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10여 분이 지난 후 동네로 고무장갑을 사러 간 동생이 돌아왔다. 일꾼들이 물을 퍼내기 시작하자, 침묵이 흐른다. 겉 다르고 속 다른 것이 묘지 속이라지만 명당(明堂)에 모신 할머니가 수장(水葬)이 되어 있었다니. 지켜보던 후손들은 근심스런 마음으로 서로를 마주 본다.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유골을 하나씩 하나씩 수습했다. 칠성판에 한지를 펴놓고 젖은 뼈 마디마디를 닦아 맞춘 다음 명전을 덮었다.

손자와 후손들이 잠들어 있는 새 묘터로 옮겼다. 광중(壙中) 안 석관(石棺)에 두 분을 내려놓으니 신방에서 붉은색 비단이불을 덮고 주무시는 것 같다. 230여 년 만의 해후였다. 이승에서의 한평생을 반추하며 서로를 따뜻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는 듯했다. 20대 부부였기에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비에 젖은 잔디가 어머니 품처럼 봉분을 품자 따사로운 햇볕이 묘지를 감싼다. 이제는 두 분이 아침에도 저녁에도 서로 마주 볼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 후손 된 도리를 한 것 같아 흐뭇하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오랜 세월 동안 조상들이 머물던 대지와 시간과의 만남에서 삶과 죽음의 의미가 명료하게 떠오르는 듯했다. 조상과 후손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내가 가야 할 길이 보이는 것만 같았다.

인간이란 결국 대지로 돌아가기 위해 녹고 있는 진흙 덩어리가 아니던가. 아침에 맺혔다 사라지는 한 방울 이슬이 아니던가. 산 자는 언젠가 뒤에 오는 자들의 조상이 되는 것임을. 하여 나에게 주어지는 시간과 삶의 자리에 감사하며, 씨앗을 품고 싹을 틔우는 한 줌의 흙과 이슬방울로 살 수 있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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