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얼굴과 우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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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우리들 삶에서 행복 추구가 하나의 목적지라면 이성보다는 감성이 지름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성은 사유로 자라고 감성은 느낌으로 깊어진다. 둘 다 우리에게 필요한 요소이지만 아무래도 행복은 감성 속에서 아늑하다.

나는 많은 감정들 중에서 웃음을 존경하고 울음을 사랑한다. 적지 않은 나이에 이르도록 웃음은 늘 생소한 손님이라면, 울음은 허물없는 친구처럼 여긴다. 그래서 웃는 사람을 부러워하고 그의 삶을 긍정한다. 우는 사람을 마음으로 끌어안고 등을 다독인다.

웃음과 울음, 이 두 가지만 잘 사귀어도 우리들 삶은 좀 더 여유롭고 포근해질 것이다.

미소, 냉소, 폭소, 앙천대소나 눈웃음, 함박웃음 등 웃음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웃는 얼굴에 침 뱉으랴.’ 라는 속담에서부터 ‘웃음치료’라는 말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삶에 두루 퍼진 것이 웃음이다.

지난해 어느 신문에서 읽은 글이 떠오른다. 한 할아버지에게 오래 산 비결을 물으니, “안 죽으니까 오래 살았지.”하고 대답하였다. 나는 대답 속의 함의를 곱씹으며 고개를 끄덕였었다. 건강식을 한다거나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게 아니라 마음을 가볍게 다스린다는 것이다. 맞는 말씀이다. 세상의 모든 짐을 혼자 짊어진 듯 살아가는 사람이 장수할 수는 없을 테다. 할아버지는 미운 사람도 내버려 두니 알아서 먼저 죽고, 화날 때도 그냥 웃어 버린다고 하면서 자나 깨나 웃으며 살라는 장수의 비법을 털어 놓았다.

돌아보니 나는 파안대소 한 번 터뜨린 적 없다. 그래도 종종 소리 없이 빙긋이 웃는다. 늑대의 미소를 지은 적이 없는 것만도 다행이지 싶다.

고백컨대 나는 울보다. 요즘 들어 더욱 그렇다. 화면에서 고난에 허덕이는 사람을 보기라도 하면 마음이 울고, 요양원의 어머님을 생각할 때면 주르륵 주르륵 눈물이 나고, 하느님에게 하소연할 때면 나도 모르게 엉엉 소리까지 동반된다. 아내는 이 사실을 감지할 테지만 좀체 내색하지 않는다. 눈물이 비밀인 양 감추며 살려는 남편의 의도를 간파하면서, 목격하고도 못 본 체하는 마음이 때론 깊다.

내게 눈물은 슬픔과 고통의 치료제이다. 신기하게도 즉석 효과를 볼 때가 많다. 어린이와 눈 맞춤이라도 하고 싶을 만큼 마음이 정화된다.

내일은 전국동시지방선거일이다. 투표소로 갈 때면 여러 얼굴과 목소리가 뒤따르고 명함과 메시지도 종종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다들 희생하고 봉사하겠다는데 단 한 사람만 골라야 한다. 나는 가면과 가식을 벗기면서 능력과 눈물샘이 많은 사람을 선택할 테다.

선거란 상대가 죽어야 자신이 사는, 모두가 윈윈할 수 없는 가혹한 제도다. 스스로 뛰어들었으니 결과를 대범하게 수용해야 한다.

아직 원숙하지 못해서인지 과정보다 결과가 궁금해진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 것이다. 지면이나 화면 속의 주인공이 못 되더라도 희생과 봉사가 진정이었다면 시간은 늘 곁에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목이 쉬도록 자신의 소신을 알린 것만도 생의 한 켜를 이루고 자신을 위로할 힘이 될 게다.

선거가 끝나면 축하와 위로라는 말이 떠돌듯, 평소에도 두루 돌아다니며 증오와 멸시를 몰아냈으면 한다. 사람 사는 일, 결국 웃고 우는 일인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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