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음의 철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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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순, 수필가

현진건의『술 권하는 사회』가 발표된 시기는 1921년이었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에 술 마시는 것 외에 달리 별일이 없던 지성인의 절망적 시대상황을 묘사했다. 소설에서는 많은 애국지성이 사회를 탓하며 술꾼으로 전락한다. 새벽에 만취되어 귀가한 남편에게 아내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누가 이렇게 술을 권했소”라고 묻는다. 남편은 “조선 사회가 술을 권한다”라고 응답하지만 남편의 내면에 내재된 심오한 고뇌를 아내는 알 수가 없다. 방황의 늪으로 향하는 남편을 향해 아내는 원망어린 독백으로 탄식한다. “이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가.”

사람들은 왜 술 권하는 사회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오늘날 음주문화는 시대적 절망에 지성인이 술꾼이 되었던 그때와는 다르다. 분단의 아픔은 있으나 나라 잃은 설움에 지성인의 할 일 없는 세상은 아니니까.

그때의 농경사회는 세기가 바뀌어 글로벌 정보화시대로 변했다. 우리나라는 휴전선을 마주하는 분단의 아픔 속에서도 가난에서 벗어나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빠르게 진행된 조국근대화 과정에서 천민자본주의 신흥부자들이 탄생했다. 부(富)가 소수에 편중되며 부익부 빈익빈으로 치달아 황금만능주의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빈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해 많은 복지 사업을 하고 있으나, 지금도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소득이 향상되고 생활은 편리해졌으나 생존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핵가족화로 1인가구가 계속증가하며 나 홀로 시대가 전개된 지 오래다. 과학이 첨단화되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풍요 속의 빈곤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난다. 중·장년세대는 급진적인 변화를 싫어하며 기존문화에 안주하고 싶은 관성의 법칙도 작용한다.

술은 시류를 차치하고 삶의 희로애락에 수반되는 약방의 감초 같은 존재다. 우리 민족은 상고 때부터 여러 가지 제의(提議)를 만들어 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술과 음식에 대한 후덕한 인심과 관용적인 태도 때문에 사교적 음주가 권장되었다. 마치 음주는 사회생활의 필수적 조건처럼 자리 잡았다. 음주는 자의적 애주 습관과 사회 분위기에 편승하여 억지로 술을 마셔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오늘날의 음주는 복잡한 세상사만큼이나 그 동기가 다양하다. 일상의 난관에 부닥치는 좌절과 환희, 각종단합대회, 환영식·송별식 등 다양한 명분으로 술자리가 이어진다. 집안에서는 가정 의례 시마다 으레 술이 따라 다닌다. 스트레스 해소 방법도 우선 술을 마시는 것이고 경사스러운 일을 축하할 때도 한잔을 권하는 게 통례이다.

나는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애주가로 반세기가 넘는 세월을 술과 함께 보냈다. 그간 술에 얽힌 추억과 일화를 어찌 다 말할까. 술 때문일까 4년 전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면서 술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제는 많이 쾌차되었지만 가끔씩 막걸리 두세 잔 정도 마신다.

술은 생활에 멋과 여유를 주는 활력소지만, 과음하면 간경화 등 치명적인 질병을 유발한다. 또한 술은 절제하지 못하는 나약함이 각종일탈과 폐해를 초래한다. 인간은 이성과 감성의 똑같은 힘이 작용한다. 과음하면 감성이 이성을 능가하여 돌출 행동을 하게 된다. 술이 술을 부른다는 과음의 철칙을 깨는 결단이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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