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동포사회의 남북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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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수, 리쓰메이칸대학 국제관계학부 특임교수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 회담까지 성사되면서 일본 사회에서도 이로 인한 파장이 만만치 않다. 북미회담 공동성명에 관해서는 기대치에 못 미친다는 논평도 적지 않지만,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의 평화 정착을 위한 교두보로서 환영한다는 소리가 크다. 시종일관 북한에 대한 ‘압력’을 강조해 온 아베 신조 총리도 북미정상회담이 ‘북한을 둘러싼 여러 현안들을 포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큰 진전’이라면서 북일 정상회담 추진 의사까지 밝혔다.

재일 동포사회도 총련(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은 역사적인 첫걸음으로 열렬한 환영의 뜻을 밝혔고, 민단(재일본대한민국민단)도 북미회담이 ‘한반도 평화체제구축과 지역 평화안정에 크게 기여하고, 북한이 국제 사회에 열려, 민주화 진전의 큰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한다’는 성명을 냈다. 남북화해와 평화 정착이 민단·총련 간의 고질적인 갈등을 해소하고 재일동포사회에서의 남북화해로 이어질지에 대한 관심도 날로 커지고 있다

재일 동포의 권익을 대표하는 2대 민족단체인 민단과 총련은 그 전신(前身)이 조직된 해방 직후부터 갈등을 이어 왔다. 한국전쟁 당시 총련계 동포들은 일본에서의 무기탄약 생산이나 수송에 반대하는 실력투쟁을 벌였고 한국을 지지하는 민단 측은 의용군(在日韓僑自願軍)을 모집해서 최전선에 투입하기도 했다. 휴전 이후에도 민단과 총련은 북한으로의 귀국 운동(소위 북송)이나 한일조약(1965년) 등 중대한 현안마다 격심한 갈등을 빚으면서 60년 이상의 세월을 넘겨 온 것이다

물론 일본에서도 남북화해의 기운이 고조된 적이 없던 것은 아니다.

4·19혁명 직후 민단은 당시 북한·총련이 제안했던 대화 노선에 호응하면서 한 때 폭넓은 대화와 교류가 이뤄졌다가 군사 쿠데타에 의해 무산됐다. 1972년 ‘7·4 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에도 민단·총련의 합동대회들이 실현됐는데 여기에는 민단개혁파만 참석해 결국은 민단 분열로 이어진다. 그 이후 권위주의 정권 시기를 막론하고 민주화와 냉전체제 붕괴라는 격동기를 거치면서도 민단·총련의 갈등은 지속됐다. 재일 동포사회에서 남북화해 기운이 활성화되기까지는 한국에서의 진보정권의 등장을 기다려야 했다, 더구나 2000년에 6·15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지자 총련의 대화 공세가 활발해지면서 2006년 5월에는 민단 총련의 정상들이 화합에 합의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5·17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민단 내부에서 비난의 소리가 잇따르고 민단을 혼란 속에 빠뜨리게 된다. 협상 과정의 불투명성이나 민주적 절차의 결여로 인한 단원들의 의심이 보수파의 반발과 결부됐던 것이다. 결국 민단 집행부는 혼란을 초래한 상황 판단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5·17공동성명’의 백지화를 결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재일 동포 사회의 남북화해는 한반도에서의 남북관계나 한국에서의 정권 교체에 크게 좌우돼 왔다. 2006년의 화합의 좌절은 제각기 남북의 분단체제에 직결하는 기존 민족단체 위주의 재일 한국인 운동의 한계를 드러낸 셈이다. 의사 결정의 근원이 한반도 두 나라 권위에서 비롯되는 한 지속적이고 진실 어린 화해를 이룩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지난날의 경험은 보여 주고 있다. 한반도에서 남북화해가 진전되면서 다시금 재일 동포 사회의 화해 가능성이 열리게 된 지금이야말로 지난날의 교훈을 재차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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