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늙고, 같은 무덤에 묻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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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 제주대 교수 교육학 전공/논설위원

여행 온 친구 부부와 함께 애월에 있는 홍윤애 묘와 대정에 있는 정난주 묘를 둘러보았습니다. 홍윤애는 정조 시해 음모로 제주에 유배되었던 조정철을 위해 죽은 제주여인입니다. 정난주는 남편 황사영의 백서(帛書)사건 때문에 제주에 유배되어 38년을 살다가 죽은 여인입니다. 저녁 자리에서 친구는 홍윤애나 정난주나 왜 여자 몸으로 홀로 묻혀 있는지 진지하게 물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질문이었습니다.

유배지에서 사랑하던 홍윤애가 역모의 누명을 변호하다가 죽지만 다행히 유배에서 풀려난 조정철은 1811년 제주목사를 자원하여 30여년 만에 자신을 구해준 제주여인의 무덤을 찾아옵니다. 이런 이유에서 양주 조씨 문중에서는 186년이 지난 1997년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경북 상주에 있는 사당에 봉안합니다. 이 때문에 무덤은 제주에 있지만 상주에 함께 묻혀 있는 거나 다를 바 없다고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천재였던 황사영은 정난주와 결혼하여 1801년 신유박해로 처형되기까지 11년간 부부생활을 합니다. 정난주는 남편이 처형된 후 38년간을 제주에서 유배생활하다가 병사합니다. 현재 황사영 묘는 경기도 양주에 있고, 정난주 묘는 제주도 대정에 있습니다. 이렇게 따로 떨어져 있지만 천주교 신자들이라 천국에서 만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함께 묻혀 있는 거나 다를 바 없다고 좀 궁색한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유배(流配)의 ‘배’는 배급, 배부 등의 ‘나누다’는 뜻도 있고, 배필, 배우자 등의 ‘짝’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사람의 짝인 부부를 멀리 나누어 놓는 행위가 바로 ‘유배’였던 것입니다. 실제 제주도 유배형을 받으면 가족을 동반할 수 없었기에 부부가 헤어져 살 수밖엔 없었습니다. 그래선지 옛 어른들은 “죽으나 사나 만나나 헤어지나, 그대와 함께 하자 언약하였노라(生死契闊 與子成說)”라고 하면서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같은 무덤에 묻히는 해로동혈(偕老同穴)을 부부의 이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같이 늙지 못한다면 같은 무덤에라도 묻히는 것이 그들의 희망이었습니다. “살아서는 집이 다르나, 죽어서는 무덤을 같이 하리라(穀則異室 死則同穴)”고 하면서 헤어져 살다가도 죽을 때는 같이 묻히고자 했던 절절한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부부가 백년을 함께 살면 아무 유감이 없었겠습니까. 천재 시인 박은은 “배필의 의리는 크니,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함께 가더라도 오히려 유감이 없을 수 없다.”(伉儷之義大矣 生則偕老 死則偕逝 猶不能無憾)라고 하면서 설령 백년해로를 했더라도 여전히 아쉽고 한스러운 것이 부부의 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같이 늙지도 못하고, 같은 무덤에도 묻히지 못한 부부들의 한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까닭에 홍윤애와 정난주를 지금이라도 남편과 함께 묻어주는 예의도 검토해볼 일인 듯합니다.

서귀포 하예동에는 ‘강진황 등대’, 사계리에는 ‘김춘지 등대’가 있습니다. 그들 부부는 일본에서 고생하며 번 돈을 기부하여 어선들의 운항을 도와주기 위해 각자의 고향에 등대를 세웠다고 합니다. 무덤 대신에 등대로 해로동혈을 하는 셈입니다. 덕분에 그 부부는 죽어서도 밤마다 등대 불빛으로 만나고 있으니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퇴임을 하고 외손녀 자랑을 하며 막걸리 두어 잔에 불콰해진 친구 부부를 보며 해로동혈하기를 빌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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