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 속에 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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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창윤 수필가

6월이 오면 생각나는 일들이 있다.

흰색 광목천 조각에 ‘상기하자 6·25 처부수자 공산당’ 리본을 왼쪽 가슴에 달고 학교 가던 일, 반공 포스터를 그리고 글짓기하던 일, 운동장에서 감격이나 울분도 없이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로 시작하는 6·25 노래를 불렀던 일, 그리고 일손이 모자란 전몰장병의 밭을 찾아가 보릿단을 나르던 일 등.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공원’을 찾았다. 1995년 7월 27일 제막된 이 기념공원은 성조기, 벽화, 조상(彫像), 비명 석판, 회고의 연못 등으로 조성되었다. 특히 시선을 끈 것은 V자형 대열로 늘어선 19명의 군인상이다. 6·25 전쟁에 참전한 다국적군의 모습을 나타낸 듯. 육군(15명)·해병(2명)·해군(1명)·공군(1명)으로 백인·흑인·히스패닉계 미국인 등 인종별로 이루어졌다. 판초우의를 입고 폭우 속을 결의에 찬 표정으로 대열을 이루어 전진하는 조각상이다. 그들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그들의 마음이 전해오는 것 같았다.

펄럭이는 성조기 앞에서 묵념을 하고, 정면에 있는 검정 대리석에 새겨진 ‘FREEDOM IS NOT FREE’ 글귀를 마주했다.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는 의미가 아닌가. 안개 자욱한 공원을 걷으며 단어의 뜻을 곱씹는다. 판초우의를 입은 아들들을 보고 있노라니, 죽음을 향하여 달려가는 듯하여 가슴에 골이 생기며 회오리바람이 인다. 우의에 쏟아지는 비는 물설고 산설은 타국에서 흘렸을 그들의 눈물이고 아픔이었을 것이다. 저들도 어느 부모의 천하보다 귀한 아들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 왔다. 과연 그들의 생명과 바꾼 가치가 무엇인가. 무거운 걸음을 옮겨 ‘한국 참전비’ 앞에 섰다.

『알지도 못하고 만난 적도 없는 나라, 그들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부름에 응한 아들과 딸들에게 조국은 경의를 표한다. 한국전쟁 1950-1953년』

서문과 함께 미군,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의 사망, 실종, 부상한 사람 등의 숫자가 새겨져 있다.

미군 사망자 54,246, 부상자 103,284, 포로 7,140, 실종자 8,177

유엔군 사망자 628,833, 부상자 1,644,453, 포로 92,970, 실종 470,267

총소리와 화약 냄새, 비명과 외침, 그리고 숨져가며 사랑하는 이들을 부른 현장이요, 설악산 전투에서 한 줌 흙으로 돌아온 숙부님을 떠올리는 현장이기도 했다.

그 후, 하버드대학 캠퍼스 도서관 맞은편에 있는 하버드 기념교회를 들렸다. 1932년 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하버드 인들을 추모하는 교회다. 안으로 들어서자 기념실 북쪽 벽 동판에 ‘한국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하버드 인들을 영구히 기념하며’라는 글귀와 함께 D. H. Flight(1953)를 비롯하여 17명의 이름과 사망 연도가 새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읽으며 빚진 자의 심정으로 머리를 숙였다. 세계를 이끌어갈 지성들이 내가 누리는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생각하니, 한참 동안 발걸음을 뗄 수 없었다.

‘자유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누리는 자유는 하나뿐인 목숨을 버린 사람들의 피의 대가이다. 그리고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와 남편을 앞세운 아내의 단장의 아픔 속에서 핀 꽃이리라. 머나먼 이국땅에서 자유의 밀알이 된 젊은이들의 영혼의 소리가 안갯속에 들리는 듯. ‘지금 그 자유로 무얼 하고 있느냐’라고.

6·25 전쟁이 발발한 지 68주년. 지난 4월 27일 판문점 회담에서 남북 두 정상이 8천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렸다”라고 천명했다. 그리고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미·북정상 회담이 열린다는 소식도 들린다. 부디 한반도에서 핵이 사라지고 전쟁이 없는 평화의 날이 어서 오기를 소망한다.

그날이 오게 하소서.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나라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않을 것이다.”(이사야 2장 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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