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正齋) 고병오(高炳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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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수 논설위원

제주 인물을 재조명하는 데 ‘제주인물대사전(김찬흡 저)’은 안성맞춤이다. 제주의 선비로 알려진 정재(正齋) 고병오(高炳五·1899~1972)는 대정읍 상모리에서 태어났다.

한평생 한복을 입고 상투를 틀고 공맹지도(孔孟之道)의 삶을 추구했다. 1926년 순종이 붕어하자 통곡하며 북방요배를 올렸다. 그러면서 “壇前滄海水 萬折必東流·우리 한민족의 힘이 솟구쳐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 들어가 일본을 혼내줄 날이 올 것이다”며 한탄했다.

일제강점기 시절엔 창씨개명을 끝내 거부했다. 대단한 결기와 의지가 없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그에게 이런 가르침을 준 이는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년)다.

▲정재는 1918년 전북 부안군 계화도로 건너가 3년 동안 간재의 문하생이 되었다. 간재는 조선 최후의 성리학자로, 전주에서 태어나 14세 때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가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했다. 학식이 풍부한 그에게 고종은 사헌부장령 등 여러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학문에 정진하기 위해 거절했다. 당시는 개화와 보수, 국력 쇠약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는 유교적 근본에 입각한 이상사회 건설을 후학들에게 외쳤다. 이런 모습은 개화파에게 눈엣가시였다.

박영효는 “개화를 위해 수구 학자의 우두머리인 간재를 죽여야 한다”며 고종에게 여러 차례 청을 하기도 했다.

간재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상소를 올려 여기에 서명한 대신들의 처단을 요청했다. 1910년 일본에 강제병합되자 부안 앞바다의 섬(계화도)으로 옮겨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의 제자만 3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제주의 상당수 청춘도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정재를 비롯해 김경종(노형), 고경수(오라), 강용범·구범(법환), 김옥림·김태교(도련), 이창원·김진하·김성하(노형), 강승추(월평), 신수범(도련), 고사규·부좌규·오병주(아라), 김경환(회천) 등이 그들이다.

▲정재도 간재처럼 고향에서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런 관계로 제자들이 ‘요정선생 문인권선회要正先生門人勸善會’를 조직해 그의 가르침을 따랐다. 그 제자들이 1998년엔 ‘고 정재 고병오 선생 학덕비’를 대정읍사무소 앞에 세웠다. 그 학덕비가 최근 그의 묘소 쪽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어디에 있든 제주 선비의 올곧음은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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