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 않는 모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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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영 수필가

해마다 5월이 오면 문학기행을 다녀올 생각에 가슴이 들뜬다.

올해는 전라남도 남부지역을 둘러보기로 했다. 매년 이맘때면 떠나는 문학기행이 내 잠자는 영혼과 우주의식을 깨워줄 값진 체험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일정표를 훑어보다가 멈칫 놀랐다. 시문학파기념관, 이곳에서 가슴 떨리는 서정시를 만나고, 내가 좋아하는 김영랑 시인의 발자취를 한눈에 담아올 수 있음에 가슴이 벅차오르면서, 어느새 마음은 모란의 향수에 젖어들고 있었다.

모란을 만난 것은 중학교 3학년 때였다.

2학기가 시작되자, 우리 여학생 반 교실은 신축교사인 교무실 옆으로 배정되었다. 교실 벽에는 모조지에 붓글씨로 쓴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라는 영랑의 시가 붙어 있었다. 아이들은 “와, 와!” 함성을 지르며 저마다의 목소리로 낭독을 하기에 바빴다. 방과 후에는 먼저 암송한 친구가 교단에 올라 시낭송을 하기도 하면서 시를 사랑하는 마음들이 싹 트기 시작했다.

시 한 편이 주는 힘은 컸다. 서정적인 교실 분위기 속에서 공부를 하면서 내 가슴속엔 시인이 되고 싶은 꿈 하나가 조용히 움트고 있었다.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아득한 꿈결 같은 학창 시절의 풍경이다. 거친 세월에 휩쓸려 살아가면서도 나는 그 학창 시절에 품고 있던 모란을 잊은 적이 없었다.

세월이 흐른 후 모란이 내게로 왔다.

어느 해 봄날 나무시장에 나갔다가 꽃망울이 맺힌 모란을 한 그루 사다가 꽃밭에 심었다. 모란이 피면, 이 꽃과의 사연을 알고 있는 아이들은 “엄마 꽃 피었다!” 라고 외치며 좋아했다. 내 가슴 속에 숨어 살던 모란꽃이 이제 어엿한 친구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모란을 두고 한림을 떠나온 지 25년. 모란꽃이 필 무렵이면 옛집 마당에 찾아가 보곤 했다. 스러졌는가 하면 다음 해에 다시 일어나 꽃을 피우는 모란의 강인함을 보면서, 잃어버린 소녀 시절의 내 꿈 하나도 서서히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 모란의 꿈이 나를 수필가의 길로 인도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면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책장 속에 있는 작은딸이 중학생 때 나에게 생일 선물로 준 시집,『모란이 피기까지는』도 오랜 세월 나의 ‘찬란한 봄’을 기다리게 도와주었는지도 모른다. 가끔 책을 꺼내 읽으면서 내 안에 다시 모란을 담곤 했다.

한참 동안 모란의 추억에 잠겨있을 즈음 광주비행장에 도착했다는 알림이 들렸다.

시문학파기념관으로 찾아가는 일행들은 모두 진한 시의 향기를 머금은 듯 한껏 상기된 표정이었다. 앞서 가는 일행 중 누군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념관 입구에는 시문학파 동인 아홉 명의 대표시가 걸려 있었고, 전시실과 북 카페가 있는 2층에는 이 땅에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한 시인들의 육필 원고와 유물이 전시되어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 저항 시인 김윤식(영랑)의 생가로 발길을 돌렸다.

문간채로 들어가기 전 영랑의 시비에 새겨놓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호흡하듯 깊이 빨아들였다. 집안과 마당 곳곳에 스며 있는 영랑의 옛 흔적과 낮게 깔려 들려오는 서정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초상화가 놓여있는 방 앞에서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한국 시문학의 수준을 한 차원 높여준 시인의 업적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았다.

‘선인들의 영혼에 길을 묻다’라는 모티브를 안고 떠난 이번 문학기행은 내게 하나의 충격으로 다가왔다. 시인은 가도 그의 영혼은 시의 선율을 타고 영원히 흐르고 있음을 느꼈고, 영혼으로 쓴 글만이 타인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는 말도 나를 흔들어 깨웠다.

이제 남은 것은 보다 겸허한 자세로 나만의 글을 쓰는 일이다. 영혼을 바쳐 씀으로써 내 영혼이 사는 길임을 떠올렸던 영랑의 생가 모습을 다시 떠올려 본다.

여름을 나고 있을 옛집의 모란 소식이 궁금한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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