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본인 폭행에 대응…‘성산포 소요 상해 치사사건’ 발생
(45)일본인 폭행에 대응…‘성산포 소요 상해 치사사건’ 발생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고원정, 모교인 애월중에 거액 쾌척
고원형, 일본서 재계 거물로 활동
고원희, 제주대학교 인문대 학장 등 역임
고유, 탐라 성주 고말로의 장남
고윤모, 정의현감
고윤문, 고봉례 14세손
고은삼, 항일운동…초대 성산면장
1946년 1월에 찍은 성산포의 모습이다. 성산포 내수면 안까지 들어온 배들이 보이고, 집들도 듬성듬성 있는 풍경이 지금과는 크게 다르다. 멀리 식산봉도 보인다. 성산포는 1884년 일본인들이 어업권을 가지고 채취를 하면서 커진 마을이다. 사진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46년 1월에 찍은 성산포의 모습이다. 성산포 내수면 안까지 들어온 배들이 보이고, 집들도 듬성듬성 있는 풍경이 지금과는 크게 다르다. 멀리 식산봉도 보인다. 성산포는 1884년 일본인들이 어업권을 가지고 채취를 하면서 커진 마을이다. 사진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고원정高元正1931(일제강점기)~2012, 교포 사업가, 제주고씨 영곡공파 새별-오름, 고인두高仁斗의 조카, 전일본全日本의 가죽 제품 제조업을 통틀어 순이익 2위라는 자리를 점유했다.

고원정은 애월읍 고내리에서 태어나 애월중학교를 거쳐 제주농업중학교 재학 중에 도일渡日, 주식회사 다카-하시’<高石>사장이며 도쿄 서일모리 1-48-7에 제1공장을, 또 서일모리 1-30-9에 제2공장을 창설, 대성했다.

애월중 교사이던 고정옥高貞玉(한림)과 도쿄에서 결혼했다.

차돌처럼 단단한 각오와 신념으로 생업에 종사하며 재력을 모으겠다는 신조로 일본식 이름 다카하시-히로마사(高石浩正)’로 개명, 고내高內상인의 특정업인 가죽 제품 제조업에 착수했다.

고원정은 김봉옥金奉玉 교장 재직 당시인 198912월 모교 애월중학교에 거액을 쾌척해 교내에는 공덕비가 건립됐다.

고원형高元衡1910(일제강점기)~, 교포사업가, 일본에서 군수軍需산업 특히 군용 피혁제품皮革製品(주로 군용가방)을 제조, 크게 부를 형성했다.

고원형은 제주고씨 전서典書공파 봉예鳳禮공계, 고내마을 구장區長 고두현高斗鉉(1888~1964)의 큰아들이다.

고원형은 1925년 애월국민학교 4년을 제1회로 45명과 함께 졸업, 도쿄의 중등학교를 거쳐 사립대학을 졸업했다.

그는 1927재일본在日本도쿄고내리소년 공창회共創會창립 발기인 8명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해방이 되자 조련계朝聯系에 가담, 조총련朝總聯으로 개편되면서 재계財界 거물로 활동. 그는 1970년대에 북쪽에 환멸幻滅을 느껴 1975년 전향轉向선언, 재일在日거류민단에 가담, 서울 나들이를 한 바는 있으나 고향을 찾은 일은 없다. 거류민단居留民團 도쿄지단 부단장 고창운高昌運의 종형이다.

1940년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이로써 한국인으로서 대단한 재력을 이루었다.

특히 일본 군벌軍閥과 재벌財閥들과 교유交遊가 늘 이루어졌다.

고원희高元禧1933~1992. 애월읍 고내리에서 고인택의 차남으로 태어나 제주농업중학교 4학년을 거쳐 오현고등학교를 졸업.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불어불문학 석사, 프랑스 솔본느대학 수학, 제주대학교 인문대학 학장 역임했다.

고유高維생몰년 미상, 고려 문신. 동북로병마부사東北路兵馬副使에 임명, 이듬해에 비서소감秘書少監, 본관은 탐라, 탐라 성주星主 고말로高末老의 장남,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고조기高兆基의 아버지이다.

1057(문종 11) 우습유右拾遺로 있었으나 간성諫省에는 맞지 않다는 중서성의 요청으로 타관他官에 임명됐다.

1070년 동북로병마부사東北路兵馬副使에 임명됐다. 이듬해에 비서소감秘書少監으로 과거를 주관하여 75인을 시취하였다.

탐라 고씨로는 최초로 고려의 관직에 올랐다.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977(경종2) 3월에 탐라 사람 고응高凝 등이 합격했다.”라고 기록되었다.

고윤모高允模생몰년 미상, 고종 때의 정의현감. 남계장南啓章의 후임으로 정의현에 도임하고 후임 현감은 홍재한洪在翰이다. 대충 추정하건대 1880년도에 재임한 듯하다.

고윤문의 교지(1703년).
고윤문의 교지(1703년).

고윤문高允文고윤문은 성주 고봉례의 14세손이다. 1703(숙종 29)에 낳아서 1746(영조 22) 명월진 조방장 등을 역임했다. 제주향청 중건에도 이바지했다.

고은삼高殷三1892(고종29)~1947(미군정기), 성산면 대운동회에서의 항일활동. 미 군정기의 청년 운동가. 광복 후의 초대 성산면장.

그는 정의현감·고창高敞현감을 지낸 고계정高啓正의 손자로 성산면 온평리<열운이>에서 태어났다.

1921년 고은삼은 민족 자본을 형성하는 길만이 국권 회복의 길이라고 여겨 성산포를 중심으로 영주瀛洲소비조합을 창설해 초대 조합장이 되었다. 그는 자본금 4000엔을 모금하며 일제의 경제적인 침탈로부터 동포의 권익을 보호하려고 노력했으나, 주민들의 이해 부족과 일제의 간섭으로 3년 만에 해산됐다.

19222월 그는 정의旌義교육기성회를 조직, 회장으로서 학교 설립 부담금을 성산면 6개리(성산·고성·오조·시흥·수산·온평)에 분담시켜 성산공립보통학교 개설에 성공했다.

1925년 성산청년회의 대표로서 제주청년연합회에 가입해 동 연합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고은삼은 1927년 성산포의 청년들에 의해서 일본인 어부를 폭살시킨 항일의거 때 배후 실력자이다. 동년 516일 성산면의 중앙 청년회 주최로 고성마을 밖 모래판에서 씨름대회가 열렸는데, 청어선鯖漁船에 종사하는 타도 출신 승무원들뿐만 아니라 일본인 어부와 선원들도 출전했다.

처음 정선한 선원 박몽주는 씨름판에서 1회 패하자 심판에게 이의를 제기 재시합을 요구, 심판원 박규언朴奎彦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때 타도 사람이 심판의 잘못이라 하며 박규언의 뺨을 때렸다.

이에 지방 청년 고태주高泰柱 외 수명이 일어나 타도 사람의 폭행에 항의했다.

결국 일본인을 포함한 선원 200여 명은 죽창·각목 등을 들고 성산 청년들에게 마구 폭행을 가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에 격분한 성산 청년들은 향토 주민 500여 명을 동원해 일본 어부와 그에게 동조하는 외지인 선원들을 닥치는 대로 때려 눕혔다.

이들이 도망쳐 숨기 시작하자 성산포 주민 전부가 일어나 방두포防頭浦 부근까지 추격, 특히 일본인에 대해서는 더욱 몰매를 가했다.

결국 일본인 선원들이 전치 2주 내지 5주의 진단을 받았다. 이 일로 일본인 구리나마<栗生外記>의 병원은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일제 당국은 평소 항일적인 청년들을 잡아가두기 시작하고 소위 성산포 소요騷擾 상해 치사사건이라고 하여 19271216일 광주지방법원에 회부했다. 고은삼(37·온평), 송세훈宋世勳(37·온평), 고승운高承雲(55·오조) 등에게는 각기 징역 3년형이 내려졌다.

고은삼은 19458월 조국이 해방 이후 면민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추대로 미 군정청에 의해 초대 성산면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194779일 이도리 불교 포교당에서 독립 촉성 국민회 제주도지부 결성 1주년 기념대회 때 부위원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