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서울 선비들만큼 우월…제주 급제자라고 깔보지 않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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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토평동 출신…오현의 아들
육예 터득해 시문 쓰는 등 재능 ‘걸출’
스승 신명규 따라 한양행…학업 정진
25세 되던 해 사마시 합격…기예 성취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 흥숙 오정빈의 무덤 전경. 묘 앞 비석에는 오정빈의 사마시 급제, 만경현령 재임 사실 등이 적혀 있다.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 흥숙 오정빈의 무덤 전경. 묘 앞 비석에는 오정빈의 사마시 급제, 만경현령 재임 사실 등이 적혀 있다.

유배인에게 아들을 맡긴 아버지

오정빈(吳廷賓, 1663~1711)과 고만첨(高萬瞻, 1672~1730)은 산남(漢拏山南)의 걸출한 두 선비다.

이들은 유배인 만구와(晩求窩) 김진구(金鎭龜) 밑에서 같이 배웠고, 1706년 제주 순무어사 이해조(李海朝)가 내도해 과거를 치를 때도 같이 급제했다.

김진구의 아들 북헌(北軒) 김춘택(金春澤)은 이들이 전시(殿試)를 보러 서울로 떠날 때 똑같이 용기를 북돋워주는 격려의 글을 손에 쥐여주기도 했다. “흥숙(오정빈)의 뜻은 정말 옛사람을 추앙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여, 마침내 기예와 학업을 성취했다. 지금 서울의 선비들에게 견주어 보아도 우월한 점이 많고 못 미치는 것이라고는 거의 없다. ()나는 서울의 사대부들이 흥숙에 대해서 혹시라도 제주의 급제자라고 비하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또 나이 차이는 나지만 두 선비 모두 객지에서 사망하여 제주에 돌아와 묻힌返葬것도 비슷하고, 정실에게서 후사가 없어 양자를 들인 것도, 두 무덤의 석물 숫자와 배치한 모양도 어찌 그리 비슷한 지 모르겠다. 제주에서 선비 오정빈을 거론하면 바로 고만첨을 거론 안 할 수 없고, 역으로도 역시 그러하다.

유배인 김진구는 제주섬의 유생 오정빈을 훌륭한 선비로 여겨 무척 아꼈다. 그래서 스승 김진구는 오정빈을 만날 때마다 시를 가르치면서 화답했고, 오정빈은 그것을 소중히 기록하고 보관하여 동천창수록(東川昌酬錄)’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몸에 지니고 다녔다.

 

북헌집에 실린 김춘택 초상.
북헌집에 실린 김춘택 초상.

동천창수록이란 김진구가 산지천 적거지에서 오정빈과 시를 주고받은 기록이라는 뜻인데, 그 책의 서문(序文)을 숙종 17(1691)에 김진구의 아들이자 후에 제주 유배인이 된 북헌 김춘택이 썼다.

오정빈은 현종 4(1663) 서귀포시 토평동에서 벽사찰방 오현(吳晛)과 제주 고씨 사이의 5(廷賓, 廷臣, 廷寅, 廷振, 廷連)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군위(軍威), 자는 흥숙(興淑), 호는 조헌(兆軒)이며, 오정빈은 광해군에게 직언을 해 미움을 사 유배 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배워 성균관 전적(典籍)을 지낸 고홍진(高弘進)의 외손으로 오정빈의 어머니가 바로 이 고홍진의 딸이다.

고홍진은 명도암 김진용과 동문수학한 사이다. 특히 풍수에 밝아 후세 사람들로부터 고전적이라고 불리며 제주 삼절(三絶)로 추앙받았다.

제주목사 이원진은 제주 읍지(邑志)를 편찬할 때 고홍진에게 교정과 감수를 맡길 정도였고, 그를 아껴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에게 소개해 그의 문하가 되었다.

고홍진은 현종 5(1664)에 과거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 벼슬을 지냈고, 풍수지리에 해박한 소두산(蘇斗山, 1627~1693) 목사와 교유하면서 그로부터 道眼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오정빈은 13세에 아버지 현()의 손에 이끌려 대정현에 유배 온 신명규(申明奎, 1618~1688)를 찾아갔다. 숙종 원년(1675), 당시 유배지 적소(謫所)에는 아버지를 찾아왔던 신임(申銋, 1639~1725)이 있었다.

신임은 이때 제주의 절경을 보고, “해가 있을 때는 용이 하늘로 오르고, 넓은 들에는 말이 구름 같구나.(有時白日龍騰天 無數靑山馬入雲)”라고 감회를 표현했다. 오정빈의 아버지는 해중(海中)에 호걸스러운 선비로서, 신명규에게 예를 갖추고는 제 아이가 13살이나 되었는데 아는 것이 보잘것없어서 경사(經史)를 배우고자 합니다. 제주 섬 안은 견문이 좁아서 세상 물정에 어둡고 고집이 셉니다. 제자로 받아 주셔서 인재를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부탁하니 거절하지 못하고 오정빈을 제자로 맞았다.

오정빈은 늘 언행을 조심했고 재능과 품행이 모두 우수했으며 가정교육이 잘 된 아이였다.

육예(六藝)를 터득해 5년 만에 시문을 쓰는 등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신명규는 오정빈에게 내심 기대를 걸면서 자()와 이름을 지어주었다.

오정빈은 18세에 유배가 풀려 돌아가는 스승 신명규를 따라 한양으로 유학을 떠났다. 어려운 한양 생활을 참으며 성균관 유생으로 학업에 정진하기를 7, 168725세가 되던 해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제주에 돌아와 부모님을 기쁘게 했다.

사마시란 소과(小科)라고도 하며, 생원·진사시라고도 한다. 사마시는 일종의 예비시험으로 입격(入格) 정원은 100명이었다. 생원시는 유교 경전의 숙지 능력의 정도를 보았고, 진사시는 문장 능력을 주로 시험했다. 사마시는 예비시험이라서 입격을 해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양반 신분을 유지하는 지식인으로서 음직(蔭職)으로 나아가는 데 기본이 되었다. 그런 면에서 경쟁은 치열했다(김학수·2010).

 

오정빈이 전시에 나아감을 보내는 김춘택의 서.
오정빈이 전시에 나아감을 보내는 김춘택의 서.

스승의 덕을 알다

오정빈이 지은 선생님을 그리워하며(戀師)’라는 시는 학문을 깨우쳐준 스승의 은혜를 생각하며 지었다.

 

어릴 적 학문에 뜻을 두고 선생님 제자가 돼(當年立志早遊門)

글자 아는 사람이 되었으니 죽어도 잊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一字人間結艸恩).

밤마다 선생님을 생각해도 그 생각 다하지 못하고 있는데(入夜相思思不盡)

차가운 강 급한 바람에 달은 서쪽으로 기울어집니다(江寒風急月黃昏).

 

오정빈의 첫 스승인 신명규의 자는 원서(元瑞), 호는 묵재(墨齋),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현종 3(1662)에 증광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신명규의 벼슬이 사헌부 집의(執義, 3)가 되었을 때 효종이 승하하자 영릉(寧陵)의 부석소(浮石所)를 관장했다.

당시 영릉(寧陵)의 총책임자는 우의정 정치화(鄭致和, 1609~1699)였고, 신명규는 부석소(浮石所)의 책임관(郎廳)이었다. 조선시대는 국상(國喪)을 당하면, 이조를 중심으로 임시기구인 권설도감(權設都監)을 설치했다. 이 권설도감은 다시 나누면 국장도감(國葬都監),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으로 세분되는데, 이렇게 세 도감을 설치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 2(1420)부터였다.

1422년 이것을 제도화하고자 예조(禮曺)에서 상제(喪制)로 정했다. 국장도감은 장례의례 전반의 집행과 상여, 주렴(朱簾), 평상(平床)의 제작, 각종 의장(儀仗), 기명(器皿)의 준비, 애책(哀冊), 인문(印文), 만장 등의 제작과 도감 내에 전체 업무를 총괄할 본청을 두고 1, 2, 3방 및 분장흥고(分長興庫:우비(雨備) 준비하는 곳)와 분전설사(分典設司:遮日遮帳을 담당)를 별도로 설치해 업무를 배분했다.

빈전도감(殯殿都監)은 염습(殮襲), 성복(成服), 성빈배설(成殯排設), 제전(祭奠), 혼전설치(魂殿設置), 각종 제기(祭器)를 만드는 것을 담당했는데, 각방(各房), 별공작(別工作)을 두어 업무를 분장하였다.

산릉도감(山陵都監)은 산릉 일대 토목공사를 담당하는 기구로, 정자각 건축, 매장과 봉분축조, 각종 석물 설치, 주변 정화의 역사(役事)를 담당했으며, 각방(各房) 및 삼물소(三物所), 조성소(造成所), 부석소(浮石所:석물소) 등으로 업무를 분장했다. 산릉도감은 조선 초까지 조묘도감(造墓都監)이라고 했으나 세종 1(1419) 정종(定宗)의 국장 때부터 산릉도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장경희·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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