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은 천국에 가져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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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은자, 이중섭미술관 학예연구사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예술문화가 싹트게 된 것은 서구의 여러 나라보다 경제적·사회적으로 한발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경제 부흥이 먼저 시작되었고, 교역 운수(運輸)의 이점이 있어 십자군도 빨리 조직됐으며, 유럽 최초로 은행 제도가 생긴 곳도 바로 이탈리아였다. 무엇보다도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예술이 싹튼 가장 큰 이유는 고대 문화유산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르면 피렌체를 필두로 하여 유럽 사회는 신 중심에서 사람 중심 세계관으로 탈바꿈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과학을 숭상하고 자연 진리 탐구의 붐을 일으켰으며,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가 새로운 시대에 재생될 수 있도록 힘썼다.

르네상스 시대에 피렌체에는 여러 가문이 있었다. 그 가운데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중심에 있었다. 『군주론』을 저술한 마키아벨리는 후에 메디치 가문에 반감을 보이기도 했지만, 당시 교황의 자금을 관리하던 피렌체 은행장이며 최고의 부자였던 메디치가의 조반니 디 비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반니는 결코 명예를 위한 권력을 추구하지 않았다. 그는 평화를 사랑했고, 전쟁을 피했다. 역경에 처한 시민들을 구원하고, 번영하도록 도왔다. 공동자본을 사적인 용도로 사용한 적이 없었으며, 공공의 부를 위해서는 자신의 돈을 사용했다. 그는 매사에 정중했다.”

메디치 가문은 평범한 가문이었지만 조반니가 은행업으로 상당한 부(富)를 축적했으며, 축적한 부를 피렌체라는 도시의 공공성을 위해 사용했다. 조반니는 아들 코시모(1386~1464)에게 “너의 어머니와 내가 열심히 일해서 모은 재산을 너에게 남긴다. 선하고 훌륭한 시민들을 기쁜 마음으로 존경하게 되면, 시민들은 우리 가문이 빛날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조반니의 유언대로 코시모는 피렌체 교황청을 장악한 로마 귀족 성직자로부터 협박을 받던 교황을 구해내고, 자신을 지지하는 수도사들과 시민들을 위해 부유한 상인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편안하게 기도할 수 있는 산 마르코 수도원 건축에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다. 이 수도원은 피렌체에서 가장 성스러운 종교단체로 자리 잡았고, 시민들이 자주 찾는 신앙생활의 중심지가 되었다.

코시모는 피렌체 자치정부의 수반이 되고도 자신을 위하기보다는 먼저 공공을 위해 돈을 씀으로써 ‘돈을 제대로 쓸 줄 아는 부자’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다.

오늘날 예술의 도시 피렌체의 명성은 메디치가와 같은 선한 부자들의 노력으로 얻어진 것이다. 예술의 가치는 어떤 수치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인간에게 기쁨과 행복감을 주는 가장 아름다운 힘이라는 사실은 시·공간을 넘어 만인에게 공감되는 것이다.

바람직한 문화예술의 도시가 되려면 오랜 시간에 걸쳐 축적된 건전한 시민의식이 있어야 하고, 경제적 부가 사회적으로 환원되어 예술적인 성과로 나와야 한다. 피렌체의 경우 부유한 상인들이 경쟁적으로 수도원이나 성당을 건설하면서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주었다. 그것을 뒷받침해준 사회적 의식이 바로 ‘황금은 천국에 가져갈 수 없다’는 이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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