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국(山水菊)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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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농업인·수필가)

후텁지근한 장마에, 매사가 마뜩잖다.

심신에 진득하게 눌러 붙는 눅눅함으로, 일손도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미상불, 하루 빨리 뽀송뽀송한일상을 회복할 날 기다릴 수밖에.

그래도 이맘때쯤 풍만한 여인처럼 피어나는 수국(水菊)으로, 모처럼 눈이 호사(豪奢)를 누릴 수 있어 위안이 된다. 꽃향기가 적어, 코가 아쉽기는 하지만.

물을 좋아해서 수국(水菊)이라 명명된 이 꽃은, 요즘 같은 장마가 제 철이다.

흠뻑 젖은 줄기와 잎사귀들은 연둣빛으로 번들거리고, 옛 여인들의 가체(?)머리 같은 꽃송이들은, 나비떼의 군무(群舞)처럼 화려하고 도발적이다.

신기하게도, 수국은 뿌리가 닿는 토양의 성질에 따라, 다양한 색깔의 꽃을 피운다고 한다.

산성 토양에서는 파랑. 염기성에서는 분홍. 그리고 중성에서는 하얀 꽃을 피운다. 뿌리의 지향점에 따라, 서너 색깔의 꽃이 한 그루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 다채로움을 더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사람살이라는 것도, 수국의 생태와 오십보백보이다.

삶의 뿌리인 성장환경에 따라, 삶의 색깔들이 천차만별이지 않는가.

수국처럼, 다름의 미학(美學) 속에, 오순도순 더불어 살아가는 지구촌 풍경은 아름답다. 다름을 차별로 오독(誤讀)하는 이들 때문에, 나라 안팎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수국이 대처(大處)의 성장(盛裝)한 여인이라면, 산수국(山水菊)은 수줍게 내외(內外)하는 산골 처자(妻子)이다.

산수국의 개화 기미가 보이면, 내 발길은 추호의 망설임 없이 깊은 산으로 향한다. 창백한 푸른빛으로 유혹하며, 섬뜩하게 다가오는 귀기(鬼氣)어린 나의 팜므파탈(femme fatale)’. 제주사람들이, ‘도채비(도깨비)이라고 부르는 그 꽃 만나러 간다.

산수국은, 큰 꽃송이들 안에, 작고 뾰족하며 소박한 꽃들을 감추고 있다. 겉꽃들은 암술과 수술이 없는 불임(不姙)헛꽃이고, 그 안 작은 꽃들이 수분(受粉)’을 하는 진꽃이다.

헛꽃의 역할은, 벌나비들을 유혹하여 진꽃의 수분을 돕는 것이 전부이다. 헛꽃이 낙화한 그 순간부터, 내 사랑 진꽃들의 은밀한 개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절대 고독의 산수국 진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실타래 같은 상념 이어간다. 진정한 인생의 아름다움과 진실에 대해서, 묻고 또 묻는다.

혹시 초로(初老)의 내가 갈구하는 가치들이, 헛꽃 같은 무의미한 것들은 아닐까.

진꽃 같은 실존(實存)을 놓치고, 헛꽃 같은 미망(迷妄)의 미로를 헤매는 것은 아닐까

바람 한 점 없는 정밀(靜謐)의 숲에서, 산수국 헛꽃 한 송이 큰 울림으로 가슴에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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