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 해녀로 ‘해녀항쟁’ 참여…‘상군 중에서 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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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응삼, 풍수지리가…‘공샘’ 발견
고이삼, 신간사 대표·道문화상 수상
고이중, 추자 어민 항일투쟁 참여
고이지, 황해도 장련현감 등 역임해
고이화, ‘제1호 제주 해녀상’ 수상
고익길, 무과 급제…한성좌윤 지내
고익보, 무신으로 명월진 만호 부임
고인단, 탐라 총관행서부사 등 지냄
1930년대 모습으로, 해녀들이 물질하기 위해 물에 들어가고 있다. 박으로 만든 테왁을 안고 헤엄치는 해녀들은 물옷으로 ‘소중의’를 입고, 물수건을 두르고, 흰 저고리를 입었다. 음력 3월중에 미역 따기가 끝나면 제주도의 해녀들은 자유롭게바다에서 전복과 소라를 땄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30년대 모습으로, 해녀들이 물질하기 위해 물에 들어가고 있다. 박으로 만든 테왁을 안고 헤엄치는 해녀들은 물옷으로 ‘소중의’를 입고, 물수건을 두르고, 흰 저고리를 입었다. 음력 3월중에 미역 따기가 끝나면 제주도의 해녀들은 자유롭게바다에서 전복과 소라를 땄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고응삼高應三생몰년 미상, 풍수지리가, 5소장의 목자牧子, 제주고씨 애월읍 어도리<도노미>에서 태어났다. 감여술堪輿術에 뛰어나 제주의 신안神眼이라고 탐라인물고에 기록됐다.

당시 집터나 산터를 자리 잡는데 그의 힘을 빌었으며 하루는 목마를 관리하노라 걷는데 일행이 몹시 목이 말라하자 어음리 지경의 산반-한질로 내려와서 한 지점을 가리키며 땅의 형세로 보아 저 곳에 샘물이 나올 듯하다.”하여 찾아가서 보니 과연 샘터에서 물이 졸졸 흐르는 것이었다.

이후로 이 목자가 이곳에 정착하자 사람들은 그의 신안을 기려 고응삼-이라고 일컬었다. 지금은 그 말이 축약와전縮約訛傳되어 -이라고 부른다.

필자의 변=애월읍 봉성리(옛 어도리)에서 어음리로 올라가는 지경에 지금도 -세미라고 부르는 셈이 있는데, 이 곳 일대는 정시 곧 고응삼의 집과 밭, 목장지대라고 한다.

고이삼高二三생몰년 미상. 우도면 출신, 재일교포, 도서출판 신간사新幹社 대표, 재동경탐라연구회 회장. 고이삼은 1991년 제주도문화상을 수상했다.

고이중高二中1889(고종26)~?, 추자도 어민의 항일활동. 본관은 제주, 하추자도<신도身島> 신양리<-작지>에서 태어났다. 1930년 경성지법에서 징역 6월형을 집행유예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고, 1933년 해녀 항일운동의 배후 인물로 지목돼 잡혀간 일도 있었다.

고이지高以智생몰년 미상, 무신. 황해도의 장련현감長連縣監, 본관은 제주. 영곡 고득종高得宗11세손. 1556(명종11)에 무과에 급제하고 주부를 거쳤다. 황해도의 장련현감長連縣監과 충청도의 태안현감 겸 절제사를 역임했다.

고이화高利花()1916(일제강점기)~ 2013, 해녀海女 상군上軍, 우도<소섬>에서 고성룡高成龍33녀 중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22세 때에 구좌읍 하도<별방>리의 이종옥李琮玉과 결혼했다. 1930년 일어난 해녀 항일운동에 참여한 해녀였다. 국내에서는 백령도, 충남 안면도와 태안반도로, 국외로는 일본 대마도를 비롯해 시스오카’<靜岡> 지방까지 출가出稼 해녀로서 해녀 활동을 해온 해녀의 상군 중에서 상군上軍이었다.

특히 아들 넷을 잘 키웠으며 이런 일로 제주 1호 해녀상海女賞을 받게 됐다.

제주 해녀어업이 국가 중요 어업유산 제1호로 지정되어 제주문화의 희소성과 보전 가치를 인정 받아 2016121일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登載됐다.

자문위원들은 제주 해녀의 고유한 공동체 문화가 전 세계적으로 희소가치가 있다고 평가한 것으로 전해졌다. 아무런 장치 없이 맨몸으로 잠수하며 전복·소라·미역·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을 직업적으로 채취하면서 불턱’, 해신당, 잠수 도구 등 등록한 해녀문화를 진화進化시켜왔다는 것이다.

일본 갈 때 해녀들이 불렀던 민요=‘1무정한 군대환은 무사 날 실러완?/ 아이구! 이토록 고생만 시켬신고?/ 하도 높은 하늘엔 별도 하도 많구나!/ 이 내 몸 억세게 놈들에게 시달려 이 모슴 쪽발이에게 매달려야 하나/ 부에짐에 님 안아 훨훨 춤춰나 볼까? <후렴> 귀신은 이신건가? 어신건가?/ 날살리려 올건가? 말건가? 2모질긴 왜놈들은 욕질만 호염주만은/ 놀개가 이시민 놀앙이라도 돌아가건만/ 놀개가 어서부난 원수라네/ 좀수질 배운 것이 한이라네/ 이 내 몸 놈들에게 놀림만 당하니 부에짐에 서방질 놀이게로 변신할가? 말가? <후렴> 귀신은 이신건가? 어신건가?/날살리려 올건가? 말건가?

고익길高益吉1606(선조39)~1673(현종14). 무신, 한성좌윤漢城左尹, 자는 경여慶汝, 호는 서곡西谷. 무과에 급제해 한성좌윤漢城左尹을 지냈다. 고순高淳의 현손이다.

고익길의 시 訪書房有詩 서당을 찾아서’=白髮重來坐小亭늙을녘에 서당 정자에 다시 앉으니/ 春風物色渾依舊봄바람 옛 풍경 그대로네/ 手栽桃李掩階庭손수 심은 도화, 이화 뜰을 덮었고/ 壁上題名半已零벽상에 쓰인 이름들 반이나 떠났네!

고익보高益普1739(영조15)~1831(순조31), 무신. 명월진 만호, 회방노인回榜老人, 자는 자겸子謙, 본관은 제주, 제주시 도련리<도련->에서 고처성高處盛<변성우의 제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같은 마을 출신 전 전적 변성우邊聖遇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18세시 향시鄕試에서 으뜸으로 합격했다. 이에 주변에서는 재덕과 필법이 뛰어나고 수복강녕壽福康寧을 갖추었다고 평했다.

고익보는 1765(영조41) 이광빈李光彬 32명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고 1778(정조2) 9월 김구정金九鼎의 후임으로 명월진 만호로 부임해 이듬해 6월에 그만두었다.

1825(순조25) 5월 그의 연령이 87세의 고령임에도 왕명에 의해 회방노인回榜老人(과거에 합격해 회갑이 되는 노인)으로 상경, 순조 임금은 그의 건강한 모습을 보고 극구 칭찬하여 가선대부(2), 동지중추부사 겸 공조참판을 내려 또 조정의 후한 대우, 또 말을 지급받고 선혜청에 명하여 양식을 넉넉히 받아 돌아왔다.

부인 백씨는 1830(순조30) 95세라는 천수를 누렸고 다음해 그도 93세로 따라가니 군자해로君子偕老라고 일컬었다.

고인단高仁旦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 때의 무신. 총관행서부사摠管行署府事, 일명 고인조高仁朝. 탐라의 성주星主. 본관은 제주, 탐라의 성주 고복수高福壽의 아들이다.

삼별초三別抄가 탐라에 들어온 때 성주星主이었으나 백성들이 중도를 지키어 삼별초가 평정 한 후에도 큰 탈이 없게 한 것은 그의 정치적 수완이다. 1294(충렬왕20) 왕으로부터 아홀牙笏·모개帽盖·등을 하사 받았는데 이것은 탐라가 완전히 고려에 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충렬왕 때 원나라가 탐라에 목축장을 마련하고 그곳에 다루가치부達魯花赤府 즉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를 설치했을 때 총관행서부사摠管行署府事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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