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흥숙이여, 그대 죽어 슬픈데 나는 살아 어찌 행복하랴”
(85)“흥숙이여, 그대 죽어 슬픈데 나는 살아 어찌 행복하랴”
  • 제주신보
  • 승인 20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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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시 급제 뒤 부친 오현 삼년상 치러
늙은 母 모시고자 제주서 진사로 살아 
김춘택과 산과 바다서 화답시 짓기도 
문과에 급제한 후 예조좌랑 등 역임
산릉도감에 소속된 기구인 부석소에서 만든 왕릉의 석물들. 부석소는 망주석, 석양, 문인석 등의 석물 제작을 담당한 기관이다.
산릉도감에 소속된 기구인 부석소에서 만든 왕릉의 석물들. 부석소는 망주석, 석양, 문인석 등의 석물 제작을 담당한 기관이다.

신명규의 제주유배

부석소는 산릉도감(山陵都監)에 소속된 기구로서, 망주석, 석양, 석호, 석마, 문인석, 무인석, 석상, 장명등, 동자석주, 좌향석, 표석함, 비석 등의 석물을 제작하는 곳이다.

효종의 능은 태조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조영됐는데, 15년이 지난 후인 1673년 영릉의 석물이 금이 가 왕릉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遷葬) 한다는 당론(黨論)으로 번졌다. 이에 현종은 당시 도감의 책임자들을 법에 의해 처벌하라하니, 효종왕릉 총책임자 정치화, 부석소 책임자 한시중·신명규 등이 체포돼 형을 기다렸다.

조선에는 최고의 형벌을 받는 십악죄(十惡罪)라는 것이 있었다. 10개의 나쁜 죄는 모반죄(謀反罪), 모대역죄(謀大逆罪) 모반죄(謀叛罪), 악역죄(惡逆罪), 부도죄(不道罪), 대불경죄(大不敬罪), 불효죄(不孝罪), 불목죄(不睦罪), 불의죄(不義罪), 내란죄(內亂罪)가 그것이다.

특히 역대 왕의 위패를 모시고 봉사하는 곳인 종묘, 왕릉 또는 궁궐을 파괴하거나 파괴할 것을 음모한 자모대역죄로 다스렸다. 모대역죄는 파괴한 당사자나 파괴할 목적으로 모의에 참여한 사람까지도 능지처사(陵遲處死)로 다스렸고, 아들의 처첩들은 공신가(功臣家)의 종으로 만들었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류승호·2010).

당시 영릉의 국장도감 책임자들이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지만 운 좋게도 가뭄이 심해 사형이 감면되면서 신명규도 제주에 유배됐다.

신명규는 1674915일 별도포로 내도하여 대정현 연래촌(延來村:현 중문면 예래동) 이애길(李愛吉)의 집을 적소로 삼았다. 숙종 6(1680) 신명규가 제주 유배살이 7년 되던 해 경신환국(庚申換局)으로 남인의 중심인물들이 처형되면서 서인이 권력을 잡게 되자 다시 진도로 이배(移配)되었다.

그 후 아들 신임이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신문고를 두드려 무죄 석방을 요구하자 숙종 9(1683) 신명규는 유배 10년 만에 방임됐다. 그 후 5년이 지나 1688년 신명규가 병을 얻어 사망하자 조정은 그를 이조판서에 추증했다. 그는 진도 봉암사에 배향됐으며, 저서로는 묵재기문록(墨齋記聞錄)’이 있다.

신명규의 아들 신임은 박세채(朴世采)의 문하였다. 신임의 자는 화중(華中), 호는 한죽(寒竹), 또는 죽리거사(竹里居士)로 벼슬이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경종 2(1722) 84세의 나이로, 정확히 아버지 신명규가 대정현 예래동에 유배온 지 48년이 되는 해에 대정현 감산촌에 유배됐다.

경종 원년(1721) 병약한 경종이 후위를 이을 수 없게 되자 경종의 동생 연잉군(延礽君:후에 영조)을 대리청정케 하는 청을 세종실록의 예를 들어 노론이 제출했다.

당시 노론 4대신이었던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영중추부사 이이명·조태채가 이에 찬성했고, 경종도 이를 흔쾌히 허락했다. 그러나 소론은 세자 책봉의 시기상조론을 내세워 연잉군의 대권 승계를 철회시켰고, 노론들은 정권에서 밀려났다. 또 소론의 대표자 김일경(金一鏡)은 목호룡(睦虎龍)을 내세워 역모죄의 무옥(誣獄)을 일으켜 노론에 큰 타격을 가하자 선량한 관리들 60여 명이 피해를 입었다.

이를 본 신임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에 대항하여 노론의 탄압과 박해를 중단하라고 비판하니, 신임 또한 소론들에 의해 노론의 일당으로 내몰려 대정현에 위리안치됐다.

신임이 대정 감산촌에서 유배된 지 4년 후 영조(英祖:연잉군)가 즉위하면서 즉시 사면됐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병을 얻어 해남 관사에서 사망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애석히 여겨 신임을 영의정에 추증하고, ‘충경(忠景)’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마시에 급제하고 잠시 고향에 내려왔던 오정빈은 아버지 오현이 세상을 떠나자 삼년상을 마치고 다시 한양으로 가 잠시 유학을 했다.

그러나 늙은 어머니를 생각해 복시를 보지 않고 고향에 내려와 진사(進士)로 살았다. 후일 김춘택은 오정빈이 다시 한양에 가서 유학을 했더라면 과거에 합격(覆試)한 지 오래였을 것이다. 어찌 감히 제주에서 어사의 시험에 응시하길 바랐겠는가?” 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오정빈은 늙은 어머니 때문에 복시(覆試)를 보러 한양으로 가지 않았다.

오정빈의 두 번째 스승은 유배인 김진구였다. 김진구는 6년간(1689~1694) 제주시 동천가에 살면서 오정빈을 가르쳤다. 그때 아버지를 모시고자 유배지에 온 김춘택을 만나 교유했다.

오정빈과 김춘택 둘은 공부를 끝내고 함께 가락천 골짜기와 청풍대(淸風臺)의 꽃, 기이한 바위, 대나무, 풀 사이를 거닐며 놀았다. 때로는 들로 나가서 먼 산을 보거나 높은 데 올라가 바다를 굽어보면서 흥이 나면 서로 화답시를 지었다.

김진구의 다른 제자들인 고만첨, 양수영(梁秀瀛) 등 여러 학생들과도 물고기 안주에 술을 마시면서 농담하고 웃으며 놀았다.

동천창수록서는 김춘택이 1706년에 제주에 유배 와서 오정빈을 다시 만날 때 그의 부탁으로 써 준 것이다.

김춘택은 오정빈의 시를 보고 순수하고 아름답다고 했으며, 또 살아가는 그의 모습을 보고 부지런하고 훌륭한 선비라고 칭찬했다.

오정빈이 복시를 본 것은 나이가 44세가 되던 숙종 32(1706), 제주순무어사 이해조(李海朝, 1660~1711)9월에 내도한 때였다. 이해조는 과거를 치루고 시험지를 가지고 이듬해 상경했고 예문제학 최석항(崔錫恒)이 심사하니 정창원, 고만첨, 오정빈 3인이 급제해 전시(殿試)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전시에 나간 오정빈은 임금 앞에서 부()를 지어 합격했고 이듬해 별시 문과(文科)에 급제해 성균관에 배속돼 학유(學諭:9), 학록(學錄:9), 학정(學正:8), 저작(著作:8), 박사(博士:7) 등을 역임하고, 전적(典籍:6), 승의랑(承義郞), 예조좌랑(禮曺佐郞:6), 춘추관 기사관(記事官:6) 등을 거쳤다.

정의현에서는 일찍이 과거 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없었는데 오정빈의 이름이 연방록(蓮榜錄)’에 오르자 섬사람들이 그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김춘택이 쓴 오정빈의 제문.
김춘택이 쓴 오정빈의 제문.

▲임지에서 서거한 오정빈

숙종 36(1710) 만경현령(萬頃縣令:5)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즈음 북헌은 만경과 가까운 임피(臨陂: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현으로 이배(移配)되었다. 오정빈은 임피로 유배 온 북헌을 세 번 찾아갔는데 갈 때마다 김춘택을 위해 음식을 가지고 가 배알했다.

연말이 되자 갑자기 오정빈에게 서신이 끊긴 것을 이상하게 여긴 김춘택은 마음이 심히 불안했다.

오정빈은 겨울에 병을 얻어 제때에 치료를 하지 못해 이듬해 1월 관사(官舍)에서 사망하니 49세가 되던 때이다.

김춘택은 이를 듣고 놀라 울부짖었고, 흐르는 눈물이 옷을 적셨다.

유배 죄인으로서 자유롭지 못한 김춘택은 대신 유생(儒生) 이세영(李世榮)에게 제문을 지어 보내 만경현령 오정빈의 영위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오정빈의 죽음에 놀라 지은 제오흥숙문(祭吳興淑文)’은 김춘택의 슬픔으로 가득 찼다.

. 흥숙이여. 그대는 죽음에 이르렀는가지금 군을 조문하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나의 슬픔만 못할 것이다. , 흥숙이여. 군은 이미 깊은 골짜기에서 우뚝 솟은 나무로 자랐으나 관()에서는 그 재능을 다하지 못하였다그대가 죽어서 슬픈데 나는 살아서 어찌 행복할 수가 있을까. 보람 없이 근심과 병약함이 쌓일 뿐이다. 그대를 생각하며 돌아보건대, 어찌 마음에 두고 잊지 못해 머뭇거리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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