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없이 무차별 학살…시신 수습도 가로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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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서 예비검속 명목 하에
4·3 가족이란 이유 등으로 학살
군경 감시 탓 시신 6년 지나 수습
희생자 묘역 조성…46위 안장돼

 

제주시 한림읍에 위치한 만벵디 묘역 전경. 1950년 한국전쟁 예비검속 시 4·3가족이란 이유 등으로 대정읍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조성한 묘역이다.
제주시 한림읍에 위치한 만벵디 묘역 전경. 1950년 한국전쟁 예비검속 시 4·3가족이란 이유 등으로 대정읍 섯알오름에서 희생된 이들의 시신을 수습해 조성한 묘역이다.

제주시 한림읍에 위치한 만벵디 묘역1950년 한국전쟁(6·25) 예비검속 시 서귀포시 대정읍 섯알오름에서 4·3가족이란 이유 등으로 학살된 수십 명의 시신을 1956년에 수습해 조성한 묘역이다.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재현된 비극

19506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또다시 비극이 찾아왔다. 보도연맹 가입자와 요시찰자 및 입산자 가족 등이 대거 예비검속돼 학살당했다.

또 전국 형무소에 수감된 4·3사건 관련자들도 즉결처분 됐다.

예비검속으로 인한 희생자와 형무소 재소자 희생자는 300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예비검속으로 희생당한 가족의 시신을 아직도 찾지 못하는 유족들이 많다.

제주에서도 예비검속이 실시됐다.

당시 경찰 공문에 따르면 195084일 당시 도내 4개 경찰서에 예비검속된 사람은 820명이었다.

그 뒤 예비검속된 사람들에 대한 구금이 지속적으로 이뤄졌고 1950820(음력 77) 제주읍 비행장, 제주항 앞바다, 송악산 섯알오름 등지에서 1000여 명이 집단 총살되거나 수장당했다.

경찰은 검속된 자들을 A·B·C·D 네 등급으로 분류했는데, C·D급은 예비검속자 등급별 조사 과정에서 군 송치 대상자로 분류돼 계엄군에 넘겨져서 총살됐다.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 한림면·대정면·안덕면 예비검속자는 총 344명이었고 이들 가운데 252명이 군(해병대)에 송치돼 희생당했다.

 

억울하게 희생된 만벵디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시.
억울하게 희생된 만벵디 희생자들을 추도하는 시.

예비검속으로 집단 희생

해병대에 송치된 예비검속자들은 두 차례에 걸쳐 집단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1차 총살은 해병대 모슬포부대에 의해 1950716~20일께 집행됐다.

모슬포 해병대원들은 총살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 미리 도착해 대기하다가 트럭에 실려 온 민간인들을 한 사람씩 굴 입구로 끌고 가 총살했다.

이어 1950820일 모슬포 주둔 해병대 제3대대 대원들은 경찰로부터 인계받은 예비검속자들을 군 트럭을 이용, 1차 총살 때와 같은 장소인 섯알오름 탄약고 터로 끌고 가 총살한 것으로 드러났다.

820일 총살은 두 차례 이뤄졌다.

모슬포 절간고구마 창고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오전 5시에, 한림 어업조합 창고에 수감됐던 사람들은 같은 날 오전 2시에 총살됐다.

같은 장소이지만 모슬포에서 끌려간 희생자들과 한림과 무릉에서 잡혀간 사람들이 희생된 위치는 약간 다르다.

총살 당일 현장을 목격한 주민에 의해 이 사실이 알려졌고 유가족 500여 명이 이곳에 몰려들어 시신을 수습하려 했다.

하지만 방첩대 소속 군인들이 이를 제지해 유가족들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했다.

억압의 역사가 스며든 묘역

만벵디 묘역에 묻혀있는 이들은 한국전쟁 직후 한림지서 관할 한림항 어업조합 창고, 무릉지서 창고에 갇혔다가 1950820(음력 77) 섯알오름 탄약고 터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사상이 의심스럽다’, ‘4·3 당시 가족 중 누군가 희생됐다’, ‘··관에 비협조적이다등의 이유로 재판 절차도 없이 목숨을 잃었다.

우익인사, 농민, 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희생됐다.

이 사건의 희생자는 62명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만벵디 묘역에는 현재 46위가 안장돼 있다.

시신 수습은 1956330일에야 이뤄졌다.

경찰과 군인들 몰래 일부 유족들이 몰래 모여 칠성판, 광목, 가마니를 준비하고 새벽 2~3시께에 섯알오름으로 트럭을 몰고 가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했다.

만벵디 묘역의 터는 유족 중 한 명이 무상으로 내놓았다.

당시 유족들은 머리 모양이나 치아, 썩지 않고 남은 옷, 소지품 등으로 일부의 시신을 구별했다.

 

오승용씨가 만벵디 묘역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오승용씨가 만벵디 묘역에서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오용승 만벵디 유족회 고문 인터뷰

오용승 만벵디 유족회 고문은 4·3을 경험했고 실제 형님이 만벵디 묘역에 묻혀 있는 피해자이자 유족이다.

오 고문은 5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오 고문은 4·3 당시 목숨을 부지하고 끼니 해결하는 것이 가장 큰 고민거리였다고 회상했다.

1950년 당시 22살이었던 오 고문의 형님 오용숙씨는 4·3 당시 입산했다가 귀순했다는 이유로 예비검속 과정에서 희생당했다.

오 고문은 몰래몰래 벌초를 하러 갈 때면 어머님께서는 형님이 이곳에 묻혀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셨다어머님께서는 생전 형님에게 밥이라도 한 끼 제대로 못 먹여 본 것을 한으로 남기시고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오 고문과 가족들은 연좌제로 인해 고통을 받기도 했지만 억울하게 학살당한 이들의 명예 회복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오 고문은 “1999년 만벵디 유족회를 결성하기 위해 3년에 걸쳐 희생자, 유족 명단을 확보했다유족회가 결성되면서 곶자왈로 변해버렸던 만벵디 묘역을 제대로 관리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오 고문은 아직도 4·3과 예비검속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이 있으며, 그 희생을 인정해주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진정한 상생과 화해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억울하게 돌아가신 영령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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