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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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기 시인

거지 중에 가장 깨끗한 거지는 ‘설거지’라는 넌센스 퀴즈를 보며 웃은 적이 있다.

사전에는 ‘음식을 먹은 뒤에 그릇 따위를 씻어 치움’이라 되어 있지만 ‘어떤 일의 마무리를 잘 하다’란 뜻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가 더 많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이 하던 일을 깔끔하게 마무리 짓기를 원한다. 위로는 대통령에서부터 아래로는 말단 공무원까지 퇴임 때까지 탈 없이 마무리를 잘 짓고 싶어 하고 그리했을 때 ‘설거지를 잘했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골프를 칠 때도 마지막 퍼터를 잘 해야지 그러지 못하면 설거지를 못했다고 자탄한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설거지를 잘 못한 사람은 역대 대통령들이다. 모두 마무리가 깨끗하지 못하여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설거지하기 어려운 것은 돈과 권력인 모양이다. 돈과 권력에는 때가 끼어 깨끗이 씻어내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돈과 권력의 때를 씻어내는 세제는 높은 도덕적 양심인데 이 세제를 쓰려니 자꾸 미련이 남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길상사를 찾아 무소유 정신으로 털끝만큼의 욕심도 멀리하여 고고하게 살다간 법정스님의 영정 앞에서 옷깃을 여미고 합장했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공직에서 퇴임한지 5년이 넘었다. 퇴임할 때 지금까지 고생한 아내를 위해 뭔가 한 가지는 꼭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해서 스스로 선택한 일이 ‘설거지’다. 식사가 끝나면 밥그릇 국그릇 냄비 쟁반 수저와 젓가락까지 세제를 묻혀 닦고 뽀드득 소리가 날 때까지 헹구어 씻으면 깔끔하게 기분이 좋다. 아내는 그 사이 티브이 앞에서 깔깔거리고, 나는 아내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저리 좋은 걸 미리 해줄 걸 하고 속으로 빙긋이 웃으며 행주를 빨아 식탁을 닦고 나면 설거지 끝! 이렇게 시작한 설거지가 벌써 5년이 넘었다.

처음엔 얼마나 갈까 하며 고맙다던 아내가 이젠 당연한 나의 일로 알고 고마워하지도 않는것 같다. 아, 가끔 해줄 걸. 그랬다면 고맙다는 말을 수십 번 들었을 텐데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

이젠 그릇에 묻은 기름때를 닦는 것처럼 내 마음에 잔뜩 낀 교만과 독선의 때를 깨끗이 씻어, 내 인생 마무리 설거지를 잘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오늘도 겸허하게 씽크대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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