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와 손자 공익에 앞장…‘좁쌀 두말’로 성공 스토리
할아버지와 손자 공익에 앞장…‘좁쌀 두말’로 성공 스토리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0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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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도, 사적지 난개발 방지 앞장
고일, 탐라 성주…고려와 물물교류
고일경, 일본인 민족차별에 저항
고일주, 일본 어민 어장 침탈 저항
고인호, 재경 제주도민회장 연임
1942년경 산지천 주변 풍경이다. 하천 위에는 광제교가 놓여 있고, 높은언덕에는 제주측후소(현 제주지방기상청)가 우뚝 서 있다. 사진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42년경 산지천 주변 풍경이다. 하천 위에는 광제교가 놓여 있고, 높은언덕에는 제주측후소(현 제주지방기상청)가 우뚝 서 있다. 사진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고인도高仁道1896(건양1)~1962, 제주도의원. 일제강점기 18년 동안 건입리장. 제주시 건입동<건들->에서 공익사업가 고서흥高瑞興의 손자로 태어났다.

고인도는 초대 제주도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임기를 마친 후 산지천山地川 하천이 일부 사람에 의해 점유허가가 되어 건물이 들어서 도시미관 훼손·수원지 오염·보건 위생상의 문제점 등 물의가 빚어지자 건입동민들은 동민대회를 열어 관에 의해 하천 점유와 건물 신축허가를 내리지 않도록 하였다.

대책위원회를 구성해 위원장에 고인도를, 부위원장에 강재량康才良을 선출했다.

고서흥(1823~1899)은 곡식 300섬을 내놓아 공덕동산을 뚫게한 독지가이다. 고인도는 고량부삼성재단의 이사장, 제주어업조합장 등을 지냈다.

특히 일본 군인들이 삼성사 경내에 있는 노송을 벌채하려고 하자 단신으로 일본군사령관과 담판하여 벌목을 방지하게 해 본도의 사적지史蹟地로 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주변에서는 조부 고서흥을 닮아 공익을 앞세워 과감히 실천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광복 후 194779일 이도리 불교포교당에서 독립촉성국민회 제주도지부 결성 1주년 기념대회 때 위원장에 박명효朴明効, 부위원장에 고인도와 고은삼高殷三(온평)을 선출하니 그는 이승만의 정치노선에 동조했다. 이는 그의 강한 추진력에 기대어 보려는 시민의 욕구 표현이었다.

자유당 말기에 이승만李承晩 정부의 부패에 환멸을 느껴 야당인 민주당에 몸담아 반 이승만 노선의 정치투쟁으로 변신했다.

 

고일高逸생몰년 미상, 고려 문종 때의 탐라 성주星主. 1062(문종16) 10, 그는 제주 토산물을 고려에 수송해 물물교류를 한 바 있었다.

이에 앞서 동년 2, 탐라 사람 고협高叶 등도 지방 토산물을 고려에 바친 바가 있었다.

 

1960년대 제주시 산지천에서 빨래하고 있는 광경. 고인도 초대 제주도의회 의원은 산지천 하천 점유와 건물 신축허가에 반대하는 대채구이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1960년대 제주시 산지천에서 빨래하고 있는 광경. 고인도 초대 제주도의회 의원은 산지천 하천 점유와 건물 신축허가에 반대하는 대채구이원회의 위원장을 맡았다.

고일경高日景1894(고종31)~?, 일본인에 저항한 항일활동, 한림읍 명월리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일경은 오사키<大阪>시 히가시나리구<東成區> 나카모도마치<中本町>에서 살며 1929년 제주교포 문창욱文昌旭과 철선鐵線공장에서 막노동에 종사했다.

언어불통으로 의사소통이 어려워 방황하니 민족차별과 모욕과 멸시를 당했다.

이에 격분한 그는 일본인 공장 감독을 묶어 골방에 가두기도 했다.

일본경찰은 고일경과 문창욱을 체포해 오사카공소원에서 불법감금죄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고일주高日柱1889(고종26)~?, 일본 어민들의 어장 침탈에 따른 항일활동. 추자면 영흥리<-구미> 태생이다. 그는 1932년에도 관련자들이 일경에 체포당해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고인호高仁昊1936(일제강점기)~2009, 사업가, 재경 제주도민회장.

고인호는 재임 중 가양동에 탐라영재관英材館의 준공(20011)에 따라 종로 연지동 도민회관은 임대하고, 서울제주도민회와 장학회 사무국을 이 곳 4층으로 이전했다.

고인호는 제주도민회의 가양동 시대를 열었고,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하는 영예를 안았다.

1948년 제주4·3사건으로 곤궁과 난제에 방황했다. 부인 김춘자金春子와 사이에 22녀를 두었다.

1956년 상경上京, 수년 회사원으로 근무하면서 기술과 경영을 체득한 후 1969년 건흥建興전기를 설립, 오늘에 이르렀다. 품질경쟁력 우수 100대 기업에 선정되었다.

1988~1992년까지 서울제주시향우회장을 지냈고, 21대 회장에 취임한 후에 도민회의 화합을 위해 노력한 결과 도민회가 전처럼 서울 제주도민들의 구심점求心點이 될 수 있었다. 그 결과 제22대 회장으로 연임하게 되었으며 온화한 성정으로 도민회 발전에 봉사했다.

특히 1억 원을 출연, 장학회를 재단법인체로 설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고 서울제주도민 백년사百年史를 발간해 제주도민회의 발자취를 집대성했다.

20053월에는 자서전 좁쌀 두말에 밑거름 되어를 펴냈다.

※ 고인호 회장과의 만남

1995년경으로 기억되는데 도민회로부터 원고청탁을 받았다. 얼마 후 고인호高仁昊(회천) 회장이 내도해 사정을 하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의 진솔함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일제강점기 제주의 재경在京 유학留學 실태를 써야 했다. 가장 자료 확보가 어려운 분야를 맡았다, 난고 끝에 2003년 간행을 보았다.

방대할 뿐이지 내용은 재경 편집 담당자에 의해 오히려 잘 다듬어지지 않음을 알았다. 완간하고서 도민회에서 나를 초청했고 감사패와 기념품을 전달 받았지만, 만족스럽지 못한 책을 보면서 말없이 돌아왔다. 당시에도 고 회장의 진솔한 말과 겸손한 모습은 역시 그대로였다. 4~5년이 지나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언제인가 만났을 때 서울 양천구에서 국회의원 선거에 입후보한 원희룡(중문)군의 당선을 위해 재경회원을 모두 동원한 얘기에 감복했다.

사실 서울에서 제주인의 첫 국회의원의 당선이었다. 나는 원 군의 고교시절 제주일고 교감으로서의 겪었던 체험과 기쁨을 말했다. 고회장의 진솔함과 정성이야 말로 배울 바이며 그저 명복을 빌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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