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동남동녀의 석상과 300년간 모진 풍상 견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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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머리 주산으로 삼은 합장묘…제주도 제23호 향토유형무산
현무암 동자석 투박함 ‘인상적’…일부 깊게 처리해 동세 긴장 더해
망주석 제주 석공이 표현한 연꽃 봉오리.
망주석 제주 석공이 표현한 연꽃 봉오리.

오정빈 무덤에 부인 합장

봄이 되자 부음을 듣고 바다를 건너 온 동생 오정신(吳廷臣)이 상례(喪禮)를 갖추었고, 관리들이 도와 영구를 호송해 제주 정의현 서홍동 도로목에 장사를 지냈다.

산담을 두른 묘역은 매우 넓다. 지난 4월 제주도 향토유형유산 제23호로 지정되었다.

무덤의 배경으로 둥그스름한 한라산 머리가 주산(主山) 역할을 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서귀포 앞바다에 떠 있는 섬들이 무척 한가롭다. 공의 무덤은 합묘로 조성되었다.

묘비에는 승훈랑행예조좌랑오공 의인강씨지묘(承訓郞行禮曺佐郞吳公 宜人姜氏之墓)라고 쓰여있다.

묘비명은 김진구와 동문수학했던 성균관 학유(學諭) 고만첨이 지었다. 외척이 되는 고만첨은 후에 평해 군수를 역임했다.

비석은 300년 풍상에 시달려 심하게 마모돼 글자를 알아볼 수 없는 것이 부지기수다.

오정빈의 부인은 진주 강씨(姜氏)로 대정현 강두환(姜斗煥)의 딸이다.

비석의 앞면 좌우로 강씨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는데 유학(幼學) 고득태(高得泰)가 강씨의 절의와 여성다움을 칭송하고 있다.

강씨는 공이 사망 후 34년을 더 살다가 갑자년(甲子年:1744) 928일 나이 8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같은 해 1222일 공의 무덤 옆에 묻혔다. 슬하에 자식이 없어 아우 오정신(吳廷臣)의 아들 명기(命虁)를 후사로 삼았다.

오정신 또한 신임(申銋)이 가르쳤다.

 

동남 동녀 동자석의 배치

오정빈 무덤의 석상은 봉분을 기준으로 하여 동자석 2, 중간에 망주석 2, 바깥쪽에 문인석 2기를 배치하고 있다.

오정빈 무덤 좌측에 있는 문인석의 모습..
오정빈 무덤 좌측에 있는 문인석의 모습..

오정빈 무덤의 동자석은 덩치가 큰 편이다. 좌측 동자석은 높이가 84cm, 넓이 35cm, 두께 30cm이며, 우측 동자석은 동녀상으로 높이 77cm, 넓이 43cm, 두께 25cm이다. 좌측 동자석은 댕기머리에 홀을 들었고, 우측 동녀상은 쪽진 머리를 하고 홀을 들고 서 있다.

동자석과 문인석들은 현무암의 특성 때문에 선이 굵고 투박하게 만들어졌지만 사실성을 가미하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큰 선으로 처리하는 과감한 솜씨는 제주지방 동자석의 미학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특성은 고졸함을 더욱 부각시키면서 단조로운 형식미로 정착하였다. 동자석의 댕기머리는 힘입게 직선으로 깎으면서 면 처리한 솜씨가 돋보인다. 양쪽으로 나뉜 댕기가 유독 크게 표현되었다.

동녀의 표현은 제주 동자석 양식에 흔히 보이는 쪽진 머리 모양이다. 얼굴을 여성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약간 하늘을 향하듯 고개를 쳐든 모습의 이 동녀상은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유지하고 있는데, 치마 입은 동녀의 모습을 표현한 때문이다. 특히 손 부분과 쪽진 머리 부분은 심도(深度)를 깊게 처리하고 있어, 얕은 선각(線刻) 위주의 밋밋한 동자석의 동세(動勢)에 긴장감을 주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석상은 동녀(童女)인가. 아니면 계례(笄禮)를 치른 성숙한 여자인가가 궁금해진다.

예로부터 양반의 집안은, 여자인 경우 15세가 되면 계례(笄禮)를 행하는 데 머리에 쪽을 지르고 그 위에 족두리를 얹고 용잠(龍簪)을 꽂는다. 옷은 녹색 저고리에 청색 치마를 입었다.

이로써 동녀에서 벗어나 혼인할 수 있는 여성이 되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에는 관례(冠禮)를 행하는 데 나이 15~20세가 되는 해 좋은 날(吉日)을 잡아 일가친척과 손님을 초청해 일정 절차의 의례를 올리고 나면, 비로소 성인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때부터 댕기머리를 상투로 틀고 망건, 초립, 도포 등을 입을 수 있다. , , 관명을 쓸 수 있으며 과거 시험, 임관(任官), 향교나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다.

무덤 앞의 동자석이 한쪽은 동자이고 다른 한쪽이 동녀인 배치는 제주 무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무덤 우측 동녀상은 홀을 들고 서 있다.
무덤 우측 동녀상은 홀을 들고 서 있다.

하지만 무덤의 동녀가 성숙한 여인은 아니다. 오정빈의 무덤 석상을 만들던 시기의 제주도 풍습은 어린아이도 쪽을 지었다. “제주 여인들은 비록 7, 8세가 된 아이라도 모두 머리를 두 가닥으로 땋아 쪽을 지었다.”라는 옛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물론 이것은 바람 많은 제주의 풍토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며, 혹은 가채의 장식을 위한 착취의 일환으로 동녀들에게도 긴 머리를 강요했을 수도 있다. 실제로 남환박물(南宦博物)’ 토산조 土産條, 토산물 가운데 땋은 머리-사람의 머리털은 매우 길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말갈기, 나전(螺鈿), 양태, 모자와 같이 긴 머리를 육지로 수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문인석과 망주석

오정빈 무덤의 문인석은 동자석을 만든 석공의 솜씨와 같다. 크기는 좌측이 높이 130cm, 넓이 43cm, 두께 33cm이고, 복두를 쓰고 복대를 매고 있고 손에는 홀을 들고 있다. 우측 문인석은 높이 121cm, 넓이 42cm, 두께 33cm로 좌측 문인석과 마찬가지로 복두, 복대, 홀을 들고 있지만 형상은 좌측 문인석과 달리 여성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

조각예술의 비례와 표현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제주의 석상들은 몸에 비해 얼굴을 유독 크게 강조하고 있으며, 표현에 있어서도 다른 부분의 묘사보다 얼굴 부분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와 같이 동자석과 문인석의 얼굴을 중시 여기는 것은 석상의 성격이 시위(侍衛)적이라는 사실, 업적을 기리는 공간에 설치되는 점, 그리고 제작 기술이 부족하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망주석은 무덤의 장소를 알리는 표시물이다. 망주석은 망두석, 망주석표, 석망주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중국에서는 화표(華表), 환표, 또는 교오주(交午柱)라고도 하여 네거리에 설치하거나 무덤 앞에 설치했던 문을 가리키는데, 특정 장소를 알리는 표식 기능이 있다.

조선시대 규정대로라면 꼭대기에 금방 피기 전의 연꽃 봉오리를 새겨야 한다. 왕릉의 망주석은 머리에 연꽃을 새기고, 기둥에는 세호를 새긴다. 제주의 망주석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듣고 본 것을 표현하는 솜씨가 턱없이 부족하여 망주석의 윗 모양은 종 모양, 남성 성기 모양 등 제멋대로 변형된 모습이어서 사람들의 억측만 무성하게 만들었다.

동녀상 뒷모습. 쪽진 머리를 하고 있다.
동녀상 뒷모습. 쪽진 머리를 하고 있다.

오정빈 무덤의 망주석은 높이가 좌측 망주석이 180cm, 우측 망주석이 171cm나 돼 큰 망주석임에도 불구하고 조립식이 아니라 통으로 만들어 세웠다. 제주 망주석은 두 가지 형식으로 만들어진다. 긴 돌을 캐어 통으로 만든 것, 머리와 몸통을 분리해 조립식으로 만든 것 등이다.

조립식은 머리 부분을 따로 만들어 끼워 넣는 것인데 이 방식은 큰 돌을 구하기 어렵거나 그런 돌을 캐어서 만들 도구가 부족한 경우, 그리고 운반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때문이다.

오정빈의 비석은 조면질 현무암석 월두형(月頭形)으로 좌대는 아주 투박하게 다듬은 사각형이고 좌대 측면에는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양각 볼륨을 준 두 개의 띠를 표현했다.

공의 무덤에 이웃하여 할아버지 유향좌수 오덕립(吳德立, 1596~ ?) 부부의 무덤이 나란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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