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생 ‘고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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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의, 자유기고가

6·13지방 선거가 막을 내리고 한 달이나 지났다. 길목마다 즐비하게 내걸렸던 현수막도 말끔히 걷히고 입후보자들 면면도 기억에서 멀어졌다. 간간히 당선 사례와 낙선자의 성원에 감사한다는 플래카드가 눈길을 끌지만 그 걸 보는 속내는 착잡하다. 치열한 축구경기일수록 골을 넣은 선수만을 기억한다.

나이를 보태다 보니 많은 선거에 참여했다. 대선·총선·지방선거, ‘김대중’과 ‘박정희’가 맞붙은 엄혹한 시절의 대선에도 한 표를 찍었다. 아마도 내가 최초로 행사한 투표권이었을 게다. 그 후로 지방자치제 실시 이전의 국회의원선거는 그 때마다 혼탁선거라는 보도가 뉴스의 중심이었다. 돈 선거라는 말이 사회 저변에 만연했다.

‘누구는 인물은 출중한데 돈이 없어서…’, ‘아무개는 돈이 많고 조직이 막강해서…’, 이런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 시절 선거철이면 어느 후보 캠프에서는 후한 대접을 받았노라고 대놓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어땠을까. 거리에서 맞닥뜨린 선거운동원이 건네는 명함 몇 장 받은 게 고작이다. TV토론, SNS가 선거운동을 주도했다. 예전 같으면 있을 법한 한 표 부탁한다는 절절함도, 하물며 점심 사겠다는 말은 아예 듣지 못했다.

이번에도 어느 후보 캠프에는 아무개 조직이 작동한다는 소문이 바람을 타는 듯했으나 아무도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때가 어느 땐데 특정조직 운운하는 아날로그식 발상을 하다니….’ 다 진부한 넋두리로 받아넘겼다. 더구나 괸당이라는 말은 얼씬거리지도 않았다.

선거운동이 한창 절정에 이른 어느 날 같은 아파트에 사는 젊은이에게, 이번 선거에 도지사를 누굴 찍을 거냐고 물었더니 “고은영”요. 대답이 거침없었다. 내가 ‘고은영’은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일천하다고 하자 발끈했다. “나이가 어리면 도지사 못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표정이 사뭇 진지했다. 그러면서 ‘고은영’ 지지의 변을 엮어갔다.

프랑스 ‘엠마누엘 마크롱’ 대통령 40세, 캐나다 ‘쥐스탱 트뤼도’ 총리 44세, 뉴질랜드 ‘제신더 아덴’ 총리 37세, 북한 국무위원장 ‘김정은’ 34세, 이래도 ‘고은영’이 나이가 어리다고 탓 할 거냐고 대들듯 했다. ‘고은영’은 내 작은딸 보다 열 살이나 연하다. 그제야 내가 말을 잘못 꺼냈구나하는 후회가 번득였다.

지난해 작은딸이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소설을 집에 두고 갔다. 소설을 펼치면서 화자가 82년생인 게 설핏 와 닿지 않았다. 그 소설이 60만 부 넘게 팔렸다는 보도를 보면서 책을 다시 꺼내들었다. 82년생 아줌마 세대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질곡을 재치 있게 묘사한 대목에서는 고개가 끄떡여졌다. 간결하면서도 울림이 있는 화두는 가히 압권이었다.

이렇게 세상은 변하고 있는데, 85년생 ‘고은영’에게 큰 맘 먹고 한 표 주지 못한 건 주책없는 소갈머리다. 구차한 변명이다. 이번에 서울시장 선거에서 4위를 차지한 ‘신지예’는 90년생 28세다. 4위의 용기가 출렁이듯 화젯거리다. 늦게나마 ‘고은영’에게 박수를 보낸다. 유효표 1만2188표는 감동이다. 발품 팔아 모은 고귀한 자산이다. 행정의 달이이라는 제1야당후보도 물리쳤고 화려한 이력의 제3당 후보도 저만치 따돌렸다. 85년생 ‘고은영’ 너무너무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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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농부 2018-07-19 12:31:04
선거기간 내내 즐거웠습니다. 고맙습니다. 고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