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간사하고 음란한 행동 마라”…‘십계’ 전파한 불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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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선화, 조천 불교 포교당 조성
고자이, 행훈련원 첨정 등 역임
고장권, 제4대 제주대학교 총장
고재륜, 조천만세운동 독립투사
고재열, 일제 초 대정군수 지내
고재일, 5·16 뒤 건설장관 등 역임
제주시 이도 2동 소재 제석사에 있는 제석당의 모습. 창건주인 고자선화는 ‘십계’로 대중을 타이르며 제주 불교 발전에 진력했다.
제주시 이도 2동 소재 제석사에 있는 제석당의 모습. 창건주인 고자선화는 ‘십계’로 대중을 타이르며 제주 불교 발전에 진력했다.

고자선화高慈善華1876(고종13)~1963, 호는 화주, 본관은 제주, 한경면 청수리<청수-> 훈장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고자선화는 어려서부터 부친한테 글과 행실을 배우고 19세 때 도원桃源<현 신도> 김해김씨 상옥尙玉과 결혼했다.

그는 아들이 없어서 48(1923)까지 병으로 고생하다가 안변安邊 석왕사釋王寺에 가서 3년 동안 불경佛經공부를 하고 52(1927)때 고향에 돌아와서 조천리에 불교 포교당을 짓고 불교 발전을 위해 진력했다.

고자선화는 일찍이 불의 가호를 입어 잘 알고 지성 기도만이 완치의 길이라 해, 제주시 이도 2동의 제석사帝釋寺 원불당願佛堂에는 찾아가는 이가 많았다.

61(1936)였던 겨울에는 현재 제주시 이도 2동 제석사帝釋寺에 제석당이라는 원불당願佛堂을 창건했다. 딸 김순완金順婉은 고자선화의 뒤를 이어 불교에 공헌하고 있다.

고자선화는 늘 바랑鉢囊을 짊어지고 방문해 기도를 드려주고 희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운수도 봐주며 남한테 타이렀다.

남을 시기질투하고 중상모략 하는 사람은 시기질투와 중상모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제석사 창건주 고자선화高慈善華의 초상.
제석사 창건주 고자선화高慈善華의 초상.

다음에 열 가지의 계가 있는데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불살생不殺生, 생물을 죽이지 말라 했으니 남을 모함하지 말고 자비심慈悲心을 가져라 한 것이다. 도둑질 하지 말 것 불투도不偸盜, 간사하고 음란한 행동을 하지 말라 불사음不邪淫, 거짓말 하지 말 것 불망어不妄語 교묘하게 잘 꾸민 말을 하지 말라 불기어不綺語, 말을 곱게 꾸며서 언족이식비言足而飾非로 사실과 다른 이야기를 해서는 아니 된다. 이런 말 저런 말 하여 두 사람을 이간시키지 말 것 불양설不兩舌, 남을 이간시키면 죽은 뒤에 발설지옥拔舌地獄에 떨어진다. 악한 말을 하지 말라 불악구不惡口, 남한테 욕설을 퍼 붓지 말아야 한다. 욕심내는 마음을 버릴 것 불탐심不貪心, 성내는 마음을 버려라 불진심不嗔心, 인지위덕忍之爲德이라 했으니 모든 일에 대해서 참는 것이다. 기한飢寒과 고통을 참고 굴욕도 참아라! 불평불만이라든지 투쟁은 참지 않는 데에서 생기는 것이다. 어리석은 마음을 버려야한다.”

고자선화는 몸이 건강해서 88세의 고령이라도 귀와 눈이 밝고 흰머리털에 얼굴이 자비스럽게 보이며 참으로 훌륭한 분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몇 해 전 비 내리는 캄캄한 여름날 밤 조천리 어느 집에 가서 기도를 드려주고 쌀 얼마 가량을 얻어 바랑 속에 담아 짊어진 후 동문다리에 왔을 때 실족失足했는 데도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고자선화는 불보살佛菩薩의 가피加被를 입은 분이라 하며 칭송이 자자했다.

 

고자이高自邇생몰년 미상, 무신, 첨정僉正, 성주 고봉례高鳳禮11세손으로 향시鄕試 무과에 급제했고 1624(인조2)에 무과 전시 병과丙科에 합격해 행훈련원 첨정僉正을 역임했다.

 

고장권의 저서.
고장권의 저서.

고장권高長權생몰년 미상. 경상남도 출신.

부산수산대학을 졸업했다. 4대 제주대학교 총장(1993912~1997911)을 지냈다.

고재륜高載崙1898(광무2)~1980, 기미년 조천만세운동 당시의 항일 활동. 본관은 제주, 고도일高道日의 아들, 산북 조천리에서 출생. 서울 사립 중동中東학교에서 수학했고, 19195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 유공을 인정해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고재륜의 증언에 의하면, 징역살이하며 노동을 하다가 출옥할 때 약간의 임금을 받았다.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이 돈을 모아서 기금에 쓰자 해 동미회同味會를 구성했다.

그 돈을 김희수金熙洙(熙明으로 개명)가 관리하고 있었다. 14동지 중 가장 오래 살다가 장남 고택구高宅球(중등 교장)의 서귀포 집에서 타계했다.

그는 생활 근거지를 산남 서귀포로 옮겨 남제주주조南濟州酒造 주식회사를 창업해 경영했다.

고재열高在悅1877(고종14)~1918(일제강점기), 전남 영광군수, 일제 초기의 대정군수. 본관은 장흥, 전남 구례군 마산면 궁산弓山리에서 태어났다.

1902(광무6) 혜민원 주사·중추원 의관·지방위원 등을 역임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동년 101일 조선총독부에서 전남 구례군求禮郡 군서기郡書記로 발령되어 일제관리로 출발했다.

전남 영광군수 역임 후, 1913312일 조선 총독부의 발령에 의해 최승칠崔承七 군수의 후임 대정군수로 또 19143월 전남 영광군수로 부임했고, 동년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통치하는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顚落하면서 그의 관직도 끝맺었다.

고재일高在一1929(일제강점기)~?, 고안병高安柄의 큰아들, 육사陸士 8기 졸업, 육군대령으로 전역, 5·16 이후 중앙정보부 비서실장秘書室長, 전매청장, 국세청장이 되어 공정 세무행정으로 인정받아 건설부장관에 등용, 80년대 초의 신군부新軍部에 의해 김종필金鍾珌 계열로 숙정肅正대상이 됐다.

앞서 건설부장관, 청와대靑瓦臺 정무비서관, 동 민원비서관, 제주고씨 성주星主공파, 애월읍 광령리<광낭->건국대 정치외교과 졸, 동 대학원 수료, 가택수색을 받고 장관직에서 해임됐으며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부인 박규림朴圭林, 외아들 고경현高景現 함께 은거하여 왔다.

그는 황조근정훈장을 수훈受勳 했다.

필자의 변 : 19808월 서울 봉천동에서 고고원찬高元贊(한동) 부인댁에서 하숙을 하면서 서울대학교의 교장자격취득 강습을 받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동창 고영기高永琪(귀덕·언론인)가 앞으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발족해 정치가 숙정과 사회악 일소가 곧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역시 고급 정보를 먼저 알고 있구나 하던 차에 다른 수강생인 교감 현영돈玄英敦(표선)이 와서 이르기를 옆집에 고재일高在一 장관이 사는데 어제 군인들이 들어와 가택수색을 하였다.”고 말했다. 계엄령 아래 광풍이 일기 시작해 무더운 여름을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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