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아기 밴 여인까지 나무에 매달고…4월의 눈물
(15)아기 밴 여인까지 나무에 매달고…4월의 눈물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8.0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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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의 자수 공작에 하귀2리 개수동 초토화
집단 총살로 주민과 소개민 등 63명 희생돼
20대 임산부 팽나무에 매달아 죽이는 ‘만행’
양민학살 고발 1호에 외도지서 경찰관 올라
제주시 애월읍 하귀2리 학원동(옛 개수동) 비학동산에 남아 있는 팽나무와 마을회관(오른쪽). 임신부가 학살됐던 또 다른 팽나무는 베어진 후 그 자리에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제주시 애월읍 하귀2리 학원동(옛 개수동) 비학동산에 남아 있는 팽나무와 마을회관(오른쪽). 임신부가 학살됐던 또 다른 팽나무는 베어진 후 그 자리에 마을회관이 들어섰다.

19484·3사건이 발생한 후 1117일부터 1231일까지 계엄령이 선포돼 강경 진압작전이 전개됐다. 청년들은 살아남기 위해 숨어서 지냈다.

1948125일 외도지서는 제주시 애월읍 하귀리 주민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월동용 땔감을 마련해야 한다며 톱과 도끼를 갖고 지서에 모이도록 했다.

주로 노인과 부녀자들이 갔으나 주목받을 게 없었던 평범한 청년들도 갔다.

동원령은 함정이었다. 청년들은 차량에 태워 실려 간 후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

외도지서는 이어 자수 공작을 펼쳤다. 하귀2리 개수동에는 이 마을 청년 10명의 이름을 통보하며 자수를 권고했다.

개수동은 현재 제주서부경찰서 서쪽 인근에 있는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은 비상이 걸렸다.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선 지목 당한 청년들이 출두해야 하지만 경찰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지목된 10명 중 한 명인 김호중씨가 앞으로 나섰다. “내가 먼저 지서로 가보겠다. 내가 무사하면 경찰의 약속을 지킨 것이니 뒤이어 자수를 하면된다며 홀로 외도지서로 갔다. 그러나 경찰은 김호중씨를 127일 총살해 버렸다.

김호중씨가 처형되자 나머지 9명의 청년들은 산으로 도주했다. 마을은 발칵 뒤집어졌다.

사흘 뒤인 1210일 이른 아침, 외도지서 경찰과 대동청년단원들이 개수동에 들이닥쳤다.

 

이승만 대통령이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경찰을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4·3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경찰을 상대로 연설하고 있다.

주민들은 전날 밤 경찰이 온다는 것을 알았지만 마땅히 피신할 곳이 없었다.

주민들은 죽음을 각오한 채 경찰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은 도피자 가족이 살고 있는 집부터 수색하며 10여 채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어 주민들을 비학(飛鶴)동산으로 모이게 했다. 마을 주민 14명과 장전리와 광령리에서 개수동으로 피난을 온 사람들도 총살당했다.

학살사건은 25세의 임산부를 팽나무에 매달아 놓고 대검과 철창으로 찔러 죽이면서 공포는 극에 달했다.

이 여인은 대정읍 출신으로 8개월 전 이 마을로 시집을 왔다.

남편 고정규가 도피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내를 죽인 것이다.

경찰 3명이 총에 대검을 꽂아 찌르는 잔혹함에 주민들은 고개를 돌렸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었던 장면은 세간의 입에 오르게 됐다.

 

1992년 팽나무를 베어내고 건립된 학원동민회관.
1992년 팽나무를 베어내고 건립된 학원동민회관.

총살 과정에서 어머니가 자식을 감싸 안은 덕분에 당시 13살이던 안인행씨(83)는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안씨는 어머니의 눈물어린 호소로 10살 난 동생은 풀려났지만 나는 눈망울이 큰 게 폭도들에게 연락함직한 놈이라며 끌려갔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에 저를 감싸며 쓰러지면서 살아남을 수 있다4·3증언채록에서 밝혔다. 당시 13살이던 고창선씨(83)는 훗날 호적과 족보를 대조하며 희생자를 확인했다. 그 결과, 43호에 56세대가 살던 개수동 마을에서 63명이 학살된 것을 밝혀냈다.

외도지서의 경찰관 대다수는 서북청년회 출신이었다.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의 후원 아래 진압작전에 참여한 서청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이들이 저지른 학살은 잔인했다.

19604·19혁명 이후 국회 차원에서 벌인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때 제주도에서 고발 1를 당한 이들이 외도지서 경찰관들이었다.

당시 제주신보는 아무리 계엄령이라도 일가족 10, 그것도 67세의 노인과 생후 10일의 영아까지 한 곳에서 총탄이 아닌 죽창과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은 용납할 수 없다며 이들의 만행을 보도했다.

4·3당시 하귀리는 1구와 2구로 이뤄졌다. 1구는 속칭 군냉이로 불렸고, 2구는 개수동, 미수동, 가문동, 답동, 번대동 등 5개 마을로 이뤄졌다.

전대미문의 4·3사건을 겪은 하귀리는 1구는 동귀리, 2구는 귀일리로 마을 이름을 바꾸었다. 개수동(蓋水洞) 역시 학원동(鶴園洞)으로 개명했다.

1995년 옛 북제주군은 조례로 동귀리는 하귀1리로, 귀일리는 하귀2리로 마을 이름을 환원했다.

 

고창선씨가 학원동민회관 건립 기념비를 가리키고 있다.
고창선씨가 학원동민회관 건립 기념비를 가리키고 있다.

도피자 가족 생사, 말 한마디에 결정돼…비학동산 참극 산증인 고창선씨 인터뷰

고창선씨(83)70년 전 마을에서 벌어진 참극을 생생히 목격했다.

계엄이 선포되자 마을 청년들은 산으로 숨었다. 무장대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 숨은 것이다.

그래서 자수를 하면 살려줄 걸로 알았는데 지서로 가면 고문을 당한 후 처형됐다.”

고씨에 따르면 경찰은 개수동 10, 미수동 5, 답동 2명 등 각 마을에 자수자 명단을 통보했다.

개수동은 10명 중 1명만 자수를 하면서 이 마을은 눈엣가시가 됐다.

비학동산에서 호명당한 도피자 가족들은 말 한마디에 생사가 결정되면서 제대로 해명을 못하고 횡설수설했죠. 그러면 그대로 끌려가 집단 총살당했습니다.”

임신부는 나가면 죽을 줄 알고 집에 있었죠. 그러다 밧줄에 묶여 끌려와서는 팽나무에 매달렸습니다. 경찰은 다른 여자들은 총살했는데 그 여자만 철창으로 찔러 죽이는 끔찍한 만행을 저질렀죠.”

4·3당시 하귀리는 320명이 학살당하면서 하귀리 출신이란 자체가 연좌제의 굴레가 됐다. 마을 명을 동귀리와 귀일리로 바꾼 이유다. 개수동도 빨갱이 마을이라는 굴레가 씌어졌다. “주소를 개수동이라고 적으면 공무원이 될 수 없었고, 개수동 출신은 군인과 경찰이 되고 싶어도 이력서조차 낼 수 없었죠. 그래서 마을 이름을 학원동으로 바꾸게 됐습니다.”

주민들은 임신부가 매달려 죽은 팽나무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싶었다. 마을에 오는 외지인들마다 저 팽나무가 맞느냐고 물을 때면 끔찍했던 공포가 되살아났다. “1992년 팽나무를 잘라 내고 그 자리에 마을회관을 지었죠. 그 날의 비극을 잊기 위해서 결국 나무를 베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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