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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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수 시인·수필가·아동문학가

기억이란 묘한 데가 있다.

나이가 들면서 매일같이 오늘만 있다고 생각하면서 사는데, 기억은 과거를 살게 해 준다. 눈도 그렇다. 시계 안에 들어오는 풍경밖에 볼 수 없는데, 기억은 수십 년 전의 풍경까지 불러 모은다.

며칠 전 일이다. 일요일 이른 아침 렌즈에 낀 먼지를 털어내곤 사진기를 들고 시골로 출사에 나섰다. 마을 골목길 어귀에는 어림잡아 4~500년쯤 돼보이는 팽나무 한 그루가 수호신처럼 마을을 품고 있었다. 곡선의 올레를 따라가 보니, 폐가가 한 채 있었다.

그런데, 담벼락 밑에 봉선화가 곱게 피어 있다. 출타 중인 옛 주인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호흡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접사렌즈를 가까이 들이댔다. 꽃 모양이 머리와 날개, 꼬리와 발을 우뚝 세운 봉황새를 닮았다고 해서 봉선화라고 붙여진 이름일까. 셔터를 몇 번이고 터뜨린다. 순간 분홍색 꽃잎 속에서 아름다운 소싯적 기억이 새롭게 피어난다.

여름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누나는 올레에 피어난 봉선화 꽃잎을 따오더니, 꽃을 짓이겨 손톱에 올려놓고 조각난 헝겊으로 단단히 싸맨다. 하루쯤 기다린 후에 조심스럽게 헝겊을 풀어낸다. 어떻게 될까? 궁금했다.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금의 매니큐어처럼 예쁜 봉선화가 손톱 위에 분홍색으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어렸고, 순수했고, 소박함, 설레는 마음은 이튿날 아침, 그 손톱에 물들인 꽃물이 지워지지 않기를 기대하며 등굣길을 서둘렀다. 교실은 예쁜 손톱전시장이 되었다. 누구의 손톱색깔이 더 아름다운지를 뽐내 보이는 한마당이다.

첫 수업시간이다. 선생님이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선다. 선생님! 저희들 손가락을 봐 주세요. 연분홍 고운 손톱 바라만보아도 교실은 온통 꽃물로 가득하다. 한 여학생이 선생님께 큰소리로 말한다. “선생님! 저는 봉선화 씨앗을 받아왔어요. 이 씨앗을 얼마 전에 다른 지방으로 전학 간 친구에게 보내주려고 합니다. 서로가 보고 싶을 때는 이 봉선화를 기억하면서 아름다운 추억을 잊지 않기로 약속한다고 마음먹었답니다.”

함박웃음을 지으시는 선생님, 참으로 좋은 일이며, 아름다운 기억에 남을 거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도심의 아이들에겐 텃밭이 없다. 텃밭이 없어도 괜찮다. 집안 한 구석 빈공간이 있으면 된다. 아니, 화분 한 개만 있어도 족하다. 아이들이 경험에서 얻은 아름다운 기억을 만들어 주는 동심의 세계를 함께 그려 보는 것은 어떨까?

이 여름이 무덥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꿈에서라도 되돌아보고 싶은 그리운 그 시절, 그 소박하고 순수하고 정겨웠던 행복한 기억이 아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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