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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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두 돌 지나도 목 굳지 않고 동공 흐리던 아이의 기억이 있다. 늘 울어대던 아이. 어미가 밤낮 업어 처네 들추며 사는데, 나는 철없이 먼 데로 나돌기만 했다. 젊은 나는 낭인처럼 술만 마셨다. 그게 아내에게 이중고를 안겨 준다는 걸 까맣게 몰랐다. 세 돌을 채우지 못하고 그 아이를 잃었다. “엄마”를 한 번 불러 보지 못한 아이의 짧은 일기가 슬펐다. 간간이 꿈에 동자(童子)가 나타난다. 해가 차 쉰이 넘었을 것인데 그것도 잊고 그적의 아기로 웃고 있다. 꿈속에서 아이는 이슬같이 눈을 빛내며 안기는데 나는 속절없이 슬프다.

잔상을 털어 내지 못해 기억의 갈피에 꽂힌 채 있다. J 고 3학년이던 박 군. 여름 방학으로 들어간 이튿날, 그가 친구랑 둘이 섬 일주 자전거 투어에 나섰다.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던 그에겐 지체장애를 극복하려는 목표가 있었다. 제2횡단도로를 타고 돌아오는 가파른 길, 내리막을 내리다 공중으로 붕 떠 가시덤불숲에 내던져졌다. 긴급 연락을 받고 교련을 담당하던 동료교사와 함께 경찰차로 현장에 갔다. 땅거미가 내려 분간이 어려운데 손전등이 뒤지더니 풀밭에 주검이 팽개쳐 있다. 얼굴을 알아 볼 수 없게 참혹했다. 넋을 잃어 버렸다. 수습은 담임인 내 몫인데 발이 떼어지질 않았다. 교련 교사가 대신했다. 그는 해병대 하사관 출신이었다.

자동차가 뜸한 1974년, 관덕정 마당이 박 군 어머니의 호곡성에 묻혔다. 고3, 다 큰 아들인데 얼마나 애통했을 것인가. 거기서 몇 걸음이면 도립병원이 있던 때, 이튿날 어설프게 차려진 박 군의 빈소에 엎디었다. 장애를 이기고 당당해지려던 그.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만 열아홉 살, 그의 짧은 생애가 하 슬펐다.

일제강점기에 빙장내외가 도일(度日)하며 조모에게 맡겨진 세 살 배기가 자라 나와 부부의 연을 맺었다. 어려운 시절, 어린 걸 키우고 시내로 학교 보내고. 큰 은혜에 처조모님이 친부모 같았다. 어른을 부양한다고 이 읍내로 집 짓고 내려왔다. 5년을 모시고 97세에 돌아가셨는데, 치매가 심했다.

어른에게서 놀라운 걸 봤다. 처가 산소를 벌초하려 집을 나서는데, 어른이 툇마루에 나앉아 계시지 않은가. “더운디 소그라.” 얼떨결에 “예, 걱정 맙써.” 무심결 대답하고 있었다. 늦게 벌초를 끝내고 돌아오는데 어른이 또 그 자리에 앉아 계신다. “소갔저 이?(수고했다)”라 했다. 정신 흐린 분이 어떻게 시간까지 손꼽으실까. 선산 벌초에 집착했으니 잠시 치매도 비켜섰나.

처가 벌초를 정리해야 할 계제다. 내 뒤를 잇기 힘들다는 생각에 절박했다. 어려움이 따랐지만 9기를 수골해 관음사 영락원 납골당에 봉안했다. 어른도 함께 모셨다. 스님 독송이 한라산 자락을 울리고 내리는데, 돌아봐도 당신 친손이 하나도 없다. 일본에 귀화한 지 오랜 세 손자. 끝내 홀몸이 되신 어른이 슬펐다.

그래도 장차 우리 내외가 옆에 든다. 당신이 귀히 키운 손녀가 가까이서 조석으로 문안드릴 테고, 옆에서 난들 무심하랴.

슬픔도 그냥 머물러 있지 않는다. 시간의 등에 업혀 흐르기도 하려니와, 가령 간직한 채라면 삭일 일이다. 막상 떠나려 하면 더 막막한 게 슬픔일지 모른다. 인생을 살아온 날의 삶의 무게로 그것을 품으면 되려니.

슬픔이여, 우리들 곁에서 떠나라. 어서 떠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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