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농의 아들로 항일운동…‘어느 혁명가의 수기’ 등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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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건, 농민조합운동 참여
고종석, 道교육위원·한림수협 조합장
고종학, 아우와 무과 급제
고준, 제주동남감목관…말 관련 상서 올려
고중명, 정의현감·장기현감 등 역임
고준석, 日서 ‘혁명사의 증언’ 등 저술
제주성내가 한눈에 펼쳐진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 제주측후소 방면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왼쪽 소나무 앞 전주 따라서 난 길은 칠성로로 판단된다. 고종건은 1930년대 제주지역에서 전개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앞장섰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성내가 한눈에 펼쳐진 이 사진은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 제주측후소 방면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왼쪽 소나무 앞 전주 따라서 난 길은 칠성로로 판단된다. 고종건은 1930년대 제주지역에서 전개된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에 앞장섰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고종건高宗虔1902(광무6)~1965, 제주도 함덕리의 추도비문에 연루되고, 또 혁명적 농민조합운동을 통해 항일 활동을 펼쳤다.

본관은 제주, 고석준高石準의 아들로 산북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19934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74주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려 독립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그는 동지 9명과 함께 체포돼 19314125명이 목포검사국으로 송치, 85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고 공소控訴했다.

동년 128일 대구복심법원은 김두성에게 징역 16월형을, 고종건, 김일준金日準, 양구문梁龜文, 김진희에게는 각각 1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하였다.

미결 기간 8개월여 동안 옥고를 치르고 압수한 조기, 비석, 상장喪章 등은 몰수당했다. 동지 김재동은 옥사하자 공소 기각되었다.

1945년 조국이 광복되자 함덕리 리민 일동의 이름으로 애도 夫生鍾 宋健鎬 韓永燮 金才童이란 비석을 새로 세우고 비문 내용은 과거의 글월을 그대로 새겼다.

고종석高宗錫한림읍 협재리에서 태어났다.

고종석은 북제주교육위원, 제주도교육위원, 대동식품 사장, 한림수협 초대2대 조합장, 이시돌노인대학 학장을 지냈다.

고종학高宗鶴1805(순조5)~?, 무신. 부호군, 제주시 도련리<도련->에서 태어났다.

철종 때에 중시重試로 무과에 급제, 중시란 이미 과거에 합격한 자에게 다시 시험을 보게 하여 급제하는 제도로서 이 중시에 합격해야 당상 정삼품의 품계品階로 올라가게 된다. 그는 평소 무예에 뛰어났다. 또 그의 아우 고종득高宗得도 무과에 급제하고 관직은 첨중추僉中樞에 이르렀다.

고준高俊무신. 제주동남감목관. 고태필高台弼(고득종의 장남)의 처부이다. 1411(태종11) 7월에 전 승녕부承寧府 판관 고준은 쌀 10섬과 콩 5섬을 하사 받았는 데, 이는 그가 앞서 조정에 말 한 필을 바쳤기 때문이다.

1431(세종13) 제주동남감목관 고준의 상서에 대해 의정부 및 제조諸曹와 의논했다.

마필을 점고하는 조목은 전일 사복시司僕寺에서 아뢴 대로 각 목장의 군두群頭·군부群副를 방문해 물은 후에 참고하여 다시 아뢰라고 했다. 고준의 상서 내용 8개 항목은 자연사한 말을 사들이는 조목, 국마둔國馬屯의 직원과 목자의 상벌 조목, 각둔各屯의 직원 목자를 정하는 조목, 번식용 말과 거세하지 아니한 말을 진상하는 조목, 목장 내에서 사렵私獵을 금지하는 조목, 각 역에 역리驛吏를 배치하는 조목은 맹사성孟思誠의 말에 따르라. 피역 향리避役鄕吏·천예賤隸 등을 출륙시키는 조목은 다시 출륙 연한을 참작해 정하고 아뢰라.”

고중명高重明1681(숙종7)~1766(영조42), 정의현감. 경상도의 장기長鬐현감.

1720(숙종46) 11, 송내백宋來栢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21(경종1) 3월에 파직돼 떠났으나 그 후 경상도의 장기長鬐현감이 되어 치적을 남겼다.

고준석高峻石1910(융희4)~1994, 일본 도쿄에서 와세다<早稻田>대학 사회사정연구회의 항일 활동.

고준석의 가명은 고영민. 구좌읍 행원리<어등->에서 태어났다.

그는 빈농의 아버지와 해녀의 장남으로 태어나 1925년 여름부터 오사카 등지에서 8년 간 노동 생활로 야간에 학업을 이었다.

서울로 돌아와서 선만경제연구소鮮滿經濟硏究所의 기자와 경성일보사 정경부의 기자로 근무했다.

앞서 1937년 교포 학생들이 와세다대학에서 우리 동창회를 조직했는데 민족주의 계열인 이상돈李相敦(전북 출신·훗날 국회의원)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다.

이에 대학 정경학부 2학년 고준석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계열은 세력을 확대, 동년 11월 회장에 취임하고 새로 선출된 위원 권중돈權仲敦(경북 출신·훗날 국회의원) 11명의 위원을 소개했다.

다음 회장의 안내로 회원 55명을 인솔해 도쿄의 일일日日신문과 전기장려관 및 조일朝日신문사를 견학했다.

19381월 마르크스주의의 연구 실천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기도하던 중 1938815일 도쿄경시청東京警視廳에 체포됐다.

19391030일 도쿄형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학업은 중단되고 오도리<小鳥>경제연구소, 노다<野田>경제연구소의 직원으로 잠시 활동 후 도쿄에서 중외中外상업신문(일본 경제신문의 전신)의 정치부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했다.

고향 친구 임해任海와 항일 운동에 투신하기로 맹세, 일본인으로 귀화했다.

19445월 서울로 들어와 경성京城일보 정경부 기자로 활동하던 중 조국광복이 되었다.

19459월 이관술(李觀述울산), 강문석姜文錫(제주)의 보증으로 조선공산당에 입당, 당 규약의 초안 작성을 의뢰받았다. 제주도 출신 공산주의자는 강창보姜昌輔, 김문준金文準, 김시용金時容 등 세 사람 정도였다.

강문석의 사위인 김달삼金達三에게 바톤을 넘기니 제주 4·3사건의 주모자로 이어졌다.

고준석은 19475월 서울에서 북로당北勞黨을 지지해 우리 신문주필 겸 정치부장이 되어 북로당의 대변을 한 관계로 투옥되고 신문은 1948526일 폐간 당했다.

19484월 남북 협상 취재 차 월북, 남조선 노동당원이면서 북조선 노동당에 가입, 북로당 노선에 동조했다. 평양에 가서 고향 친구 임해任海의 부부를 만나게 됐는데, 임해는 북로당 간부로 있다가 북조선인민위원회 기획 부장으로 옮겨 있었다.

임해를 통해 북한의 실상과 북한의 지도상 군상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그는 일본 도쿄에서 집필 활동에 몰두해 조선(1945~1950) 혁명사의 증언’(1972), ‘해방 정국의 증언-어느 혁명가의 수기’(1987) 등 많은 저서를 내놓았으며, 공산주의의 증언적 체험기로 일관되게 서술했다.

필자의 변 : 고준석의 부인 김사임金師任(1923~1951)은 항일운동가다. 본관은 광산이며 강원도 이천군의 갑부 김영석金永石의 딸로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 도쿄의 니홍<日本>여자대학 재학 중 1940년에 결혼했다. 194511월 공산당에 입당, 김철수金綴洙 의 당 세포에 소속됐다. 고준석과 함께 1950년 조선노동당 남조선 정치공작위원 사건으로 구속됐으나 출산을 위해 보석됐다. 당시 31녀의 어머니인데 6·25로 전화戰禍를 입어 2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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