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어떤 바람에도 끄떡없는 품새…여유로운 기백이 완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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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매봉 주산으로 삼은 ‘부부 합묘’ 
동자석·망주석·문인석 2기씩 마주
역삼각형 수염…김만일 무덤 참고
서귀포시 서홍동 삼매봉 인근에 있는 초대감목관 김대길 무덤의 전경. 무덤은 부부 합묘로 조성됐다.
서귀포시 서홍동 삼매봉 인근에 있는 초대감목관 김대길 무덤의 전경. 무덤은 부부 합묘로 조성됐다.

삼매봉은 135m, 옛 명사들이 수명장수의 별인 노인성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라 해 유명했는데 지금은 옛 삼매양(三每陽) 봉수 터에 남성정이라는 팔각정이 세워져 있다.

삼매봉에서 보는 한라산은 우람하면서도 선이 부드럽고 아름답다.

한라산 정상이 사람의 머리가 되고 양팔을 벌려 서귀포를 고이 감싸며 내려다보는 것처럼 마치 자애로운 설문대할망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렇다. 사람의 마음은 어떤 형상을 볼 때 자기의 느낌대로 상상할 수 있고, 감흥을 받거나 나름 알고 있는 이야기를 말하고 남긴다. 이런 것이 사람의 감성이고 풍취이다.

풍취란 자연을 보고 느끼는 정감인데 오늘날은 후기 산업사회의 도래로 인해 사람들에게 이런 풍취가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인간이 자꾸만 자연에서 멀어지는 느낌, 그러다 보면 자연에 대한 경외감과 공감은 사라지고 인간은 자연 위에 군림하고 있는 초월적 존재인 양 거만하게 변한다.

말로는 지속 가능한 친환경 개발이다 해도 그 내면의 진실은 자연 파괴를 감추기 위한 자본의 합리화이다. 결국 인간은 자연으로 돌아갈 자신이 바로 자연 자체였다는 사실을 망각하다 늦게야 그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경주 김씨 집안에 세습되던 감목관

헌마공신 김만일(1550~1632)에게는 아들 일곱과 딸이 하나 있었는데 큰 아들 대명(大鳴), 둘째 아들 대성(大聲), 셋째 아들 대길(大吉)이고, 넷째 아들 대진(大振), 다섯째 아들 대종(大鐘), 여섯째 아들 대원(大遠). 일곱째 아들 의동(義同)이고, 딸은 유배인 간옹 이익(李瀷,1579~1624)에게 출가하여 이윤을 낳았다.

큰 아들 대명(大鳴, 1575~1629)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쟁에 참전하여 무공을 세웠고, 1595(선조 38) 무과에 급제해 전라도 보성군수를 역임했다. 배필은 숙부인 송씨다.

둘째 아들 대성(大聲,1578~?)은 벼슬이 절충장군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龍?衛副司果)에 이르렀고 숙부인 제주 고씨에게 장가들었다.

김만일의 셋째 아들은 김대길(金大吉, 1608~1668)이다. 김대길의 자는 경보(慶甫), 호는 장전(長田)으로 정의현 의귀리에서 태어났다.

1630년 무과에 급제해 아버지 김만일을 본받아 효종 9(1658) 조정에 말 208마리를 헌마했더니 그 공로로 감목관(監牧官)직을 하사받아 초대 감목관이 되었고 그 후 대대로 감목관직을 세습하게 되었다.

이에 녹산장(鹿山場)에 말을 방목하여 좋은 말을 정기적으로 받쳤다. 그의 10년 감목관 재직 동안 녹산장에 말의 수는 모두 2033필이 되었다. 그것의 10분의 1203필의 말을 3년에 한 번씩 바치는 것이 정해졌다.

이후 그의 장남 김반(金磻) 대에 이르러 이를 승계해 3년마다 말 200필 씩 조정에 바치는 것이 대대로 이어졌다. 그 공로로 김반은 전라도 흥덕현감이 되었다.

인생살이가 마치 바다와 같다고나 할까. 잔잔한 때도 있지만 출렁일 때, 격랑이 일 때도 있는 법이다.

경주 김씨 집안에 감목관직이 세습되다가 숙종 28(1703) 감목관 김진혁(金振爀) 때에 이르러 그 감목관 직이 혁파되었다.

숙종 43(1717)에 김세태의 아우 김세화(金世華)가 한양으로 찾아 가고 여러 차례 상소를 올리는 등 갖은 노력 끝에 경종 원년(1721) 20년 만에 비로소 감목관직을 환직하기도 했고, 다시 고종 30(1895)에 이르러 마지막 감목관 김경흡 때 이르러 경주 김씨 집안의 청원에 의해 마침내 210년 동안 이어지던 감모관직이 폐지가 되었다.

후대의 역사학자 김석익은 김만일의 가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김만일은 본관이 경주다. 정의현 의귀촌에 살며 집안의 재산이 많았는데 하인이 수 백 명이었고, 말이 3000~4000마리나 있어, 산야(山野)에 두루 퍼져 탐라의 세력 있는 가문이 되었다.

일찍이 나라에 가축이 모자란 것을 한탄하더니 선조조에 말 500마리를 동서별목장에서 길러 바치니 조정에서는 그 공로로 지중추 오위도총관의 벼슬을 내리고 숭정대부의 품계를 가자 했다.

효종 9년 무술(1658)년에 김만일 아들 김대길과 손자 김려(金礪)가 또 산장에서 방목하던 말 200마리를 바치니 조정에서는 김대길을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으로 삼아 6품의 벼슬을 내리고는 특별히 명령해 그 자손으로 하여금 감목관을 세습케 하니 이로부터 음사(蔭仕)가 끊이질 않았다.

김대명은 벼슬이 보성군수에 이르렀고 김대길의 형이다. 김반(金磻)은 벼슬이 흥덕현감에 이르니 김대길의 아들이다.

김반의 아들 김우천(金羽遷)은 숙종 39년 계사(1713)년에 본도의 감진(監賑)을 맡아 비축했던 곡식 140석을 진휼해 이로써 부호군(副護軍)에 가자(加資) 되었고 김우천의 아들 김남헌(金南獻)은 벽사찰방이 되었다.”

한 집안의 흥망에는 항상 어떤 계기가 있게 마련이다.

김만일 집안의 경우처럼 말이라고 하는 당대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많았는데 가장 필요한 시기였던 임진왜란 때에 그 말의 힘이 큰 빛을 발휘한 것이다.

가문의 흥기(興起)는 때론 한 사람에 의해서, 때론 그 가문에 의해서 후손이 좌우되기도 한다.

여전히 우리나라가 교육열이 높은 것은 바로 지난 시대가 과거시험에 목숨을 걸었고, 오로지 그 과거에 급제해야만 돈과 명예, 그리고 권력의 발판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김대길의 비석.
김대길의 비석.

김대길의 무덤

삼매봉 북쪽 내리막 기슭 허리에는 일주도로가 지나가고, 그 길을 넘어 아래로 하논의 너른 벌판을 마주하여 김만일이 셋째 아들 김대길의 무덤이 고즈넉하다.

삼매봉을 주산(主山)으로 삼아 자연히 형성된 이중 화산체 하논(大沓)의 볼록한 화구륜을 좌청룡과 우백호로 삼았다.

마치 삼매봉을 중심으로 동서로 둥글게 감싸 안은 하논을 바라보는 김대길의 무덤은 제주의 어떤 바람에도 끄떡없다는 품새로 여유로운 기백이 완연하다.

만약에 하논이 산정호수였다면 금세 한라산의 얼굴이 비쳤을 정도로 그런 대단한 절경이 펼쳐졌을 것이다.

하논은 자연적으로 습지가 형성돼 지금도 물이 많아 하논 동편으로 수로가 조성돼 있다.

이곳은 항상 벼가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어 예로부터 논으로 이용되었다.

하논 중앙에 봉긋한 작은 언덕 숲을 넘어 고근산이 안산의 형국인 양 시야에 들어왔다.

무덤은 부부 합묘로 산담이 있기 때문에 외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산담은 평균 너비 150정도로 튼튼하게 만들어져 있어 영혼의 울타리로서는 적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담은 앞면의 산담 길이가 1600, 뒷면 산담의 길이가 1450이고, 좌우측이 1850, 직사각형을 비켜난 살짝 마름모꼴이다.

산담 왼편으로 올레가 있었으나 돌로 그 길을 막아 단석 계단을 놓았다. 역시 왼쪽에 올레가 있는 것으로 보아 남자 중심으로 올레를 트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담 좌우는 기울기를 줄이려고 산담 중간 부분에서 50가량 기울기를 내리는 계단을 만들어 하논 쪽으로 비탈진 기울기를 완만하도록 했다. 산담의 높이는 앞쪽이 140, 뒤쪽이 60정도, 측면 산담의 높이는 60의 기울기로 내려가 140에 이른다.

봉분은 지름이 550, 용미까지 400이고 봉분 높이는 150이다. 봉분 앞 좌측으로 비석이 측면으로 보이도록 세워졌으며 비양(碑陽)에는 資憲大夫中樞府事行監牧官金公, 配貞夫人谷山康氏之墓라고 돼 있고 비양 우측 구석으로 이 무덤이 반득이 왓에서 이장한 사실을 명기했다.

이 비를 만든 시기는 1918년 겨울, 세운 이는 10대손 김은설이다.

김대길의 무덤 석상은 차례대로 동자석 2, 망주석 2, 문인석 2기를 마주보고 세웠다. 석재는 서귀포 조면암이다.

석상들은 아마추어 솜씨로 고졸미를 보여준다.

석상의 양식은 고형(古形)이라 동자석은 단조롭고 고졸하다. 문인석은 복두를 쓰고 콧등이 높고 무척 길다.

문인석의 수염이 역삼각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아버지 김만일 무덤의 석상들을 참고해 만든 것이다. 긴 수염에 비해 작은 홀을 들고 있다.

동자석의 머리는 민머리이다. 전체적으로 석공의 솜씨가 조악하여 표정은 겨우 선각으로 흉내 낼 수 있는 정도이다.

제주도 동자석의 특징은 비록 솜씨가 서툴지만 바로 투박미가 있는데 그 아름다움의 비밀은 자연에서 사는 제주인의 솔직한 삶의 태도와 바람 때문에 드세듯 한 제주어를 닮았기 때문이다.

세련되고 정교한 것들이 결코 제주에 안 맞는다는 진실이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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