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김만일 손자 고위 무관 되다…조선 초기 거진 지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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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반, 초대 산마감목관 김대길 장남
어모장군 수군첨절제사 등 역임해
숙종 2년 전라도 흥덕 현감으로 부임
서귀포시 한남리 김반 부부 방묘
동자석·망주석·문인석 2기씩 놓여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반득전에 있는 김반의 무덤.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 2기씩 놓여 있다.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반득전에 있는 김반의 무덤.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 2기씩 놓여 있다.

초대 산마감목관 김대길의 장남

김반(金磻, 1629~1698)은 헌마공신 김만일의 손자로 셋째 아들인 초대 산마감목관 김대길의 장남이다.

묘비에는 태어난 해가 병인년(1626) 617일로 기록돼 있다.

김반의 가계를 알기 위해서는 약간의 이해가 필요하다.

헌마공신 김만일에게는 모두 네 명의 부인에 61녀를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남평문씨(南平文氏) 서봉(瑞鳳)의 딸로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장자(長子)가 대명(大鳴)이고, 차자(次子)는 대성(大聲)이다. 둘째 부인은 창녕(昌寧) 성씨(成氏)로 덕포(德浦) 첨사(僉使) 성경륜(成敬倫)의 딸이다. 창녕(昌寧) 성씨(成氏) 소생으로 대길(大吉)과 대진(大振) 두 아들을 두었는데 3(三子)가 대길(大吉)이고 4(四子)가 대진(大振)이다.

셋째 부인은 또 창녕 성씨로 두 아들을 낳았는데 5(五子)가 대종(大鐘)이고, 6(六子)가 대원(大遠)이다.

넷째 부인은 밀양 박씨로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말자(末子)인 의동(義同)이다.

딸 하나는 대길(大吉)보다 나이가 일곱 살 위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족보에는 명기되지 않아 남평문씨 소생일 가능성이 있지만 분명하지가 않다.

김반의 아버지 김대길은 김만일의 둘째 부인인 창녕성씨 소생으로, 곡산(谷山) 강씨 대현(大賢)의 딸과 혼인해 장남 반(), (), , 영일(永逸)이 있다.

김반은 1659년 무과(武科) 을과(乙科)1인으로 급제해 1665815일 어모장군행임치수군첨절제사(禦侮將軍行臨淄水軍僉節制使)가 되었다.

어모장군은 종3품 당하관의 품계이고, 첨절제사는 종3품 무관직 벼슬이다. 그래서 행이라는 말을 쓰고 있다.

1672년 첨지중추부사겸나주진관(僉知中樞府事兼羅州鎭管), 1675년 흥덕현감(興德縣監)을 지내고 1698년에 돌아갔다.

김반의 배위는 제주 양씨이고 슬하에 5남을 낳았는데 장남은 우천(羽遷)이다.

품계가 높은 사람을 낮은 관직에 임용하는 계고직비(階高職卑)의 경우를 ()’이라고 하고, 반대로 품계가 낮은 사람을 높은 관직에 임용하는 계비직고(階卑職高)의 경우를 ()’라 하며 이를 행수법(行守法)이라고 한다.

 

초대 산마감목관 김대길 장남 김반의 교지.
초대 산마감목관 김대길 장남 김반의 교지.

임치도 수군첨절제사

수군첨절제사는 조선 초기 군사체제인 진관체제(鎭管體制)에서 거진(巨鎭)의 지휘관이었다.

거진은 각 도()의 군사거점으로 주변의 여러 진(諸鎭)을 통솔했다. 병마첨절제사와 수군첨절제사는 무예 시험을 통과해야 선발되었으나 무과급제자·겸사복·내금위는 이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근무일수는 900일이었으며 가족을 동반해 부임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 직을 역임한 사람은 수령을 지내지 않았더라도 품계를 올려주는 특전을 받았다.

수군첨절제사는 주요한 포구(浦口)에 설치된 거진(巨鎭)에서 인근의 제진(諸鎭)을 이루는 수군만호(水軍萬戶)를 관장했다.

고려 말 수군이 재건되면서 도 단위로 몇 명의 도만호(都萬戶)가 임명되었다. 조선에 들어서자 이들은 각도의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가 생긴 후에도 그대로 존속했다.

그 후 진관 체제가 확립되면서 도만호를 수군첨절제사로 개칭했다.

전라도를 우도와 좌도로 나누었는데 전라좌도의 진()은 사도진(蛇渡鎭)이 있고, 전라우도의 진()은 임치도진(臨淄島鎭)이 있었다.

전라도의 진관 체제를 보면, 3품 병마수군절제사 1[제주진(濟州鎭)], 병마절제사 1[전주진(全州鎭)], 3품 병마첨절제사 4[나주진(羅州鎭장흥진(長興鎭남원진(南原鎭순천진(順天鎭)], 수군첨절제사 2[사도진(蛇渡鎭임치도진(臨淄島鎭)]이 있었다.

임치도(臨淄島)는 영광군에 속하며 본래 백제의 무시이군(武尸伊郡)이었는데, 신라 때 무령군(武靈郡)이라 고쳤고,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따랐다. 임치도(臨淄島) 둘레가 50리이고, 목장이 있다.

임치진(臨淄鎭)은 함풍현의 서쪽 77리에 있으며, 영광군의 임치도와 마주 보고 있는데, 전라우도 수군첨절제사의 영아(營衙)가 있다.

관할하는 곳은 검모포(黔毛浦법성포·다경포(多慶浦목포(木浦어란포(於蘭浦군산포(群山浦남도포(南桃浦금갑도(金甲島)이며 수군첨절제사가 진관(鎭管)이다.

임치(臨淄)는 지금의 전라남도 무안군 해제면 임수리 임치 마을에 있었던 임치진(臨淄鎭)을 가리킨다.

이 마을 뒤에는 진성(鎭城)이 남아있고, 예전에 나루터로 사용했던 흔적도 있으며, 가까이에 원갑사라는 절이 있다.

처음 성종대에는 임치(臨淄)진관만 두었다. 중종대의 군사조직 개편으로 가리포(加里浦)진관이 설치되었고, 숙종 대에 접어들어 서해안 방어의 중요성이 증대하면서 위도(蝟島)진관의 개설로 3진관 체제가 되엇으며 그 아래에 20속진이 포진하고 있다.(‘조선왕조실록 전문사전 편찬한국학중앙연구원)

 

김반이 현감으로 있었던 흥덕현

김반은 숙종 2(1675)년 전라도 흥덕(興德) 현감(縣監)으로 부임하여 이듬해 5월까지 재임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흥덕현(興德縣)은 전라도 나주목의 한 현이다. 본래 백제의 상칠현(上柒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상질현(尙質縣)으로 고쳐서 고부군(古阜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창덕현(昌德縣)으로 고쳐서 고창(高敞)으로써 감무(監務)를 겸하게 하다가, 충렬왕 24년에 흥덕현으로 고쳤다.

흥덕현의 가호는 총 216호로써 인구가 1051명이었다. 땅의 10분의 4가 기름지며, 간전(墾田)3134결이고 간전과 논이 반반이다. 생산물은 오곡과 목화·왕골·밤이다.

토공(土貢)은 여우가죽·삵괭이가죽·족제비털·상어·자리·대껍질방석·작설차·석류··[黃蠟()이요, 약재(藥材)는 겨우살이풀뿌리·호라비좆뿌리[天門冬녹각교(鹿角膠오징어뼈·잉어쓸개다. 염창(鹽倉)은 성안에 있으며 공사 염간(公私鹽干)이 아울러 38명인데, ·가을에 바치는 소금이 327섬이다. 자기소(瓷器所)가 한 곳이 있고, 도기소(陶器所)가 둘 있다. 현 읍성(邑城)은 둘레가 295()이다.

 

김반 무덤의 동자석(동녀상)
김반 무덤의 동자석(동녀상)

김반의 무덤

김반은 1698년 무인(戊寅) 1217일 서거하자 지금의 서귀포시 한남리 반득전(班得田)에 묻혔다.

비석은 귀부원수(龜趺圓首)이다. 묘비는 通政大夫興德縣監金公之墓라고 음각으로 12자가 새겨 있고 300여 년의 풍상에 시달린 탓에 비석 훼손이 급속하게 일어나고 등에 받치고 있는 귀부가 아는지 모르는지 또 한 해를 넘기고 있다.

무덤 뒤편 오른쪽으로 김만일의 둘째 부인 창녕 성씨의 무덤이 있다. 바로 김대길의 어머니이니 김반의 할머니가 되는 셈이다.

석물은 동자석 2, 망주석 2. 문인석 2기다. 동자석은 2기 모두 머리에 쪽을 진 모양인데 동녀만 있다.

대개 쪽을 진 동녀가 있으면 하나는 동자가 돼야 하는데 김만일 집안에서만 동녀가 있는 경우를 찾아 볼 수가 있다.

손에 향을 꼽을 수 있게 작은 구멍을 뚫었다. 문인석은 눈이 크고 코가 작으며 입이 튀어나와 있다. 키가 크고 머리에 복두를 썼고 수염이 있으며, 손을 깍지 끼듯 함께 모아 홀을 들고 있다.

석물은 모두 걸쇠오름 조면암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산담의 좌측면으로 올레를 텄는데 산담 밖 올레에 팡돌을 놓았다. 묘역은 대규모로 조성돼 있고, 김반의 무덤 뒤로 묘비 없는 봉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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