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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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6·25전쟁으로 한반도가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북에서 내려온 월남민과 피란민들로 요동쳤다. 고향을 떠나 온 그들은 국토 최남단 제주에까지 몰려들었다

아홉 살, 나는 아슴푸레 그때를 기억한다. 작은 섬이 피란민들로 북적댔다. 반장이 골목을 돌며 방 한 칸 비워 내라 호소했다. 우리 집 외양간에 달린 방 하나에 피란민 한 가족이 들어왔다. 보잘것없이 작은 방에 여섯 식구

그 해 여름 밤, 마당에 멍석 깔고 누웠는데 피란민 아이가 입을 오물거리며 오더니 오징어발 하날 내게 줬다. 얼떨결에 입에다 넣었다. 질겅질겅 씹히는 맛에서 향이 났다. 오징어는 그게 처음이었다. 걔의 낯선 말씨에 질리던 나는 아무 말 않고 삶은 옥수수 두 개를 쥐어 줬다. 내 팔뚝만한 거였다. 씩 웃더니 가족에게 달려갔다. 저만 먹을 수 없었을 것이다. 처음엔 도시 냄새가 풍겼지만, 그들은 굶기를 밥 먹듯 하는 것 같아 몹시 안쓰러웠다.

가을이 깊어 가자, 피란민들이 삼삼오오 밭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추수 뒤 이삭줍기에 나선 것이다. 고구마 이삭을 마대에 담아 둘러메고 오던 게 눈에 어른거린다. 그들은 억척스러웠다. 얼마 후 시장 동네에 가게를 내는 이들이 눈에 띄더니, 몇 년 새 마을 상권을 장악했다. 빵집, 잡화상, 가구점, 신발가게, 세탁소

아이들도 학교에 다녔다. 동창생에 선후배를 합하면 이십여 명은 됐다. 여러 세대가 피란민수용소에 살았다. 걔들은 쌈질을 잘했지만 정의로웠다. 동창생 S는 마을에서 고교를 나와 세탁소를 하기도 했다. 그는 이웃마을 여자동창과 결혼하면서 주변과 친화했다. 그뿐 아니다. 그들 2세들의 경제활동은 눈에 띄게 활발하고 적극적이어서, 대부분이 성공했다.

놀라운 일이었다. 시내에 살다 고향에 가 보니, 그들 거의가 마을을 떠나고 없었다.  밑천을 장만해 짐 싸든 건가. 마을을 거니는데 옛 동창생들 얼굴이 하나 둘 줄을 선다. 그리움이 밀려와 보고 싶었다. 같이 공부하고 함께 놀던 그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휑했다. ‘귀소본능인 걸 어떻게.’ 하지만 말 한마디 없이 떠난 그들과의 이별이 슬펐다.

남았던 단 한 친구, 초등학교 동창생, 태권도 9단 보유자였던 A.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도 그하고는 의기투합했다. 장가들더니 피란민수용소를 나와 시내에서 극장 기두주임에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며 전전했다. 날렵했다. 싸움판에 나서지 말라고 여러 번 회유했다. 살롱 종업원과의 밀애로 가정이 흔들릴 때도 떼어 놓았다. 파월장병으로 월남에 갔을 때는 당시 제주신문 보내기에 동참했다. 제주 소식을 알 수 있어 좋아  했다.

제대 후, 집도 장만하고 불끈 일어서나 했더니 주저앉고 말았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데다 그는 저축할 줄을 몰랐다. 아들 결혼식에 갔다 깜짝 놀랐다. 휠체어에 앉아 건장한 청년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뒤로 검은 양복을 입은 어깨들이 줄을 섰다. 한때 훨훨 날던 그가 그렇게 망가지다니. 말도 몇 마디 나눠 보지 못하고 헤어졌다. 왜 그랬을까. 정신이 온전해 보이지 않았다.

그 뒤, 일 년 채 안돼 부음을 들었으나 장례를 치른 후였다. 마치 보디가드처럼 나를 감싸던 단 하나의 피란민 친구. 파란의 한 생을 접고 이 섬에 묻혔다. 하지만 회갑에 못 미친 그의 짧은 생애가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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