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처량, 1717년 식년문과에 병과 급제…삼성사 위패 봉안 바로 잡기도
▲고창옥高昌玉①:1904(광무8)~1981 하귀중학교 창설자:호는 운사雲史, 제주고씨 전서典書공파, 고영삼高英三의 장남, 애월읍 하귀리<귀리> ‘개-물’에서 태어나 서울 사립 휘문고보徽文高普 4년 중퇴, 1947년 3·1시위에 관여, 미군정 재판에 의해 복역 중에 1950년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옥되었다.
앞서 해방 후에 학교 복구가 여의치 않아 서울의 사업가 조정구趙鼎九에게 학교를 넘기자 단국檀國중학교로 출범했다.
여러 해에 걸쳐 출타 생활하던 중 서울에서 두 아들이 그의 임종臨終을 지키는 가운데 병몰하였다.
애월면 면사무소 서기로 피명, 사립 하귀초등교 개설에 헌신, 민족주의 이념이 강한 당시의 지성인이었다.
해방 직후 초대 하귀리 이장, 점차 사회주의운동에 동참하면서 후진육영에 뜻을 두어 먼저 사립 하귀중학원을 인가받아 ‘바굼지-오름’쪽에 교사校舍를 짓고 운영 중에 태풍으로 무너졌다.
▲고창석高昌錫:생몰년 미상. 안덕면 사계리 태생. 경북대학교 사학과 졸업. 제주대학교 교수. 저서 ‘耽羅國史料集’(1995), ‘19세기 濟州社會硏究’(1997), ‘濟州島綾城具氏宗家古文書’(1998), ‘濟州島古文書硏究’(2002), ‘古文書集成’(2002), ‘濟州歷史硏究’(2007).
▲고창옥高昶玉②:1908(융희2)~1963, 일본 고베<神戶>에서 공산당의 항일 활동. 1932년 10월에 검거되고, 1933년 징역 2년에 집행 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일명 고반보高伴保, 고인순高仁順의 장남으로 조천리에서 태어나 고베<神戶>시 임전구林田區 장리정庄里町에서 전협全協 화학노조 효고현<兵庫縣>지부 ‘적기赤旗’배포계에 소속되어 활동하던 중 1932년 9월 일본인 보과길박保科吉博의 권유로 일본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고창옥은 일본공산당 당원으로서 고베<神戶>시 서부 지방의 고무 공장을 대상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다가 1932년에 재일在日 한인 수는 약 39만여 명, 이 무렵 일본 공산당 당원으로 검거된 한인 수는 실제로 49명인데, 이들 가운데 14명은 아마도 전협 관계자 또는 그 밖의 관계자로 집계된 까닭에 공산당원으로서는 35명만으로 집계되어 있는 것 같다.
당시 효고현지방 한인 사회의 특성은 주민 수에 대한 노동 인구의 비율이 높은 데에 있었다.
▲고창운高昌運:1925(일제강점기)~?, 재일교포, 민단 간부, 재일거류민단 도쿄도본부 부단장, 사업가, 제주고씨 전서典書공파, 鳳禮공계 고내리 고두환高斗煥의 아들, 교포 고원형高遠衡의 종제, 일본 도쿄 電氣제일공업학교를 거쳐 메이지<明治>대학 법과 졸, 아라가와구<荒川區>지부 단장, 민단 동지부의장 및 감찰위원장과 고문을 역임했다.
재일본 제주개발협회 회장, 민족평화통일 자문위원, 국민훈장 목련장 수훈, 아라가와<荒川>한국인 상공회 상임고문, 일본 도쿄에 거주, 부인 주증자와 2남 1녀를 두었다.
▲고처량高處亮:1688(숙종14)~1762(영조38), 문신. 제주향교 교수. 자는 명숙明叔, 제주시 화북동에서 부사과 고의찰高義察의 6남으로 태어났다. 전시에 나아가 1717년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앞서 1721년(경종1) 6월 이조좌랑, 1725년(영조1) 전라도 구례현감이 되었으나 신임사화辛壬士禍로 조정이 불안해지자 귀향하였다.
1736년(영조12) 제주향교 교수로 있으면서 문묘를 수리 확장하고 유림의 청금록靑衿錄을 처음으로 성안하였다.
현곡玄谷 유영선柳永善이 지은 ‘현감고공처량묘지縣監高公處亮墓誌’문이 오늘에 전한다.
제주독운위유어사 심성희沈聖希가 들어와 인재를 구할 때 추천으로 1733년(영조9)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봉상奉常판관이 되고 1716년(숙종42) 제주별견어사別遣御史 황구하黃龜河가 내도, 시취할 때에 고만갑高萬甲, 정창선鄭敞選 등과 함께 문과에 급제, 이때의 시제試題는 ‘춘화의진대부春和議賑貸賦’였다.
이듬해 3월 경남 진해현감이 되어 재임 중 그의 형 고처형과 조카 고영복高榮復이 제주에서 자기를 만나러 오던 도중 완도군 청산도 앞 바다에서 조난을 당하자 그는 1734년 11월 제문祭文을 지어 영령을 위로하였다.
이렇게 숙질이 함께 해난 사고로 잃게 된 슬픔으로 현감의 임기를 마치자 더 이상 관직에 나가지 않기로 마음먹어 다시 귀향하였다.
같은 해 겨울 제주목사 김정金정(호 노봉)에게 청하여 제주 동성 안에 삼천서당三泉書堂을 세우게 하고 인재 육성을 기본으로 삼았다.
한편, 삼성사에 주벽主壁으로 모셔 왔던 위패 봉안이 잘못된 것을 알고 1740년(영조16) 9월에 판관 고한장高漢章과 함께 제주목사 안경운安慶雲에게 품자品字형으로 환원하여 모실 것을 건의하니 고을나를 주벽으로 모시게 하였으며 목사는 이러한 사실을 기문으로 남겨 두었다.
▲고철수高喆洙:1933∼2016, 제주도의원, 제주시 삼도리 ‘무근성’에서 고재길高在吉의 3남이며 항일 독립운동가 고영수의 아우이다.
오현중 재학중 학도병 해병대 4기로 지원해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 중 전상을 입어 충무忠武무공훈장을 받아 명예제대하여 1957년 제주대학 법과를 마쳐 교육계에 투신, 1960년 12월 12일 제주도의원 선거에 입후보하여 제주시 제4선거구에서 1747표를 얻어 최연소자로 당선되어 문교사회분과 위원장이 되었다.
후일 해병참전회 회장, 고양부 삼성문화재단 이사장, 제주대총동창회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2016년 5월 10일 병몰하니 오라리 부모 묘 곁에 모셨다.
▲고청高淸:생몰년 미상, 탐라의 시조 고을나高乙那의 15대손(일설에는 12대손). 고후·고청 등 3형제가 처음으로 신라에 가서 고후高厚는 성주星主, 고청은 왕자王子, 고계는 도내徒內라는 작위를 받았다. 이로부터 국호를 탐라라 하였다.
신라에서 이들은 건입포로 들어와 전제봉건 정치를 강화하였다. 自此로子孫蕃盛하니 敬事國家하여 改以로 高爲星主하고 良爲王子하고 夫爲都上하여 後又改에 良爲梁이라 하여 三國遺事에 載海東安弘記하니 列九韓하여 屯羅는 居四라 하였다.“라고, 둔라는 탐라의 별칭이니 이 글에서 처음 보이는 말이다.
▲고충석高忠錫:우도면 출신. 제7대 제주대학교 총장(2005.5.1~2009.4.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