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행은 세상사 근본, 부모에 욕된 이름 남기지 말아야
효행은 세상사 근본, 부모에 욕된 이름 남기지 말아야
  • 제주신보
  • 승인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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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여 년 이어진 산마감독관직 폐지, 집안 위세 흔들려
김세화의 ‘격쟁’…천신만고 노력 끝에 조상 명예 되찾아
서귀포시 토평동이 있는 김진혁 부부의 합묘.
서귀포시 토평동이 있는 김진혁 부부의 합묘.

근본은 변하지 않는다

세태가 끝 가는 곳 모르게 변하더라도 자기가 현실에 있는 한 잊지 말아야 할 근본이 있다면 부모에 대한 효행인데, 사람들은 바로 그 효행이 세상사의 근본이었다는 사실을 부모가 돌아가신 후에야 알게 된다. 사람들이 항상 자신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으려는 것은 자신의 몸을 부모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김만일 집안의 위기

조선 팔도에서 잘 나가던 헌마공신 김만일 집안에도 한때 위기가 닥친 시기가 있었는데 그의 자손들이 부모와의 근본을 지키기 위해 눈물겹도록 노력한 적이 있었다.

이형상 목사 재임 시 김진혁은 산마감목관이었다. 김진혁은 김만일의 둘째 아들 김대성의 증손으로, 안정적으로 세습되던 산마감목관직이 비로소 김진혁에 이르러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숙종 28(1702) 제주 목사 이형상은 순력 시 목장 관리에 대한 폐막을 임금께 옛 법을 고쳐 마정(馬政)을 정상화시켜야 한다는 장계를 올렸다. 제주 산마감목관은 나라에 진상할 마소를 기르고 그것을 번식시키는 임무를 맡은 종 6품직으로, 김만일의 셋째 아들 김대길이 초대 산마감목관으로 임명된 지 40여 년 경주 김씨 일가에서 그 직을 세습하는 동안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하며, (제주)도민들에게 권력을 남용할 뿐만 아니라 부하 목졸(牧卒)들을 괴롭힌다는 관민(官民)과 목졸들의 진정이 있었던 차에, 이형상은 이런 내용을 수레와 말, 목장을 관장하던 기관인 사복시(司僕寺)를 통해 임금께 아뢰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은 그 때 당장 경주 김씨 가의 산마감목관직을 혁파하지는 않았다. 산마감목관직이 폐지된 시기는 정확한 연도를 알 수 없으나, 산마감목관 김우천(金雨遷,1654~1716)이 숙종 29(1703)부터 산마감목관에 임명되고 숙종 33(1707) 23일에 차귀진 병마 만호로 자리를 옮기던 시기로 부터 정의현감 조명주(趙命周, 재임기간:1711~1713)가 숙종 39(1713) 산마감목관 자격으로 봉진마 3필을 바친 6년 동안의 어느 한 시기로 추정되니, 170723일 이후 1713년 사이에 혁파 된 것이다(김만일 평전).

한편 경주 김씨 일가의 산마감목관직이 폐지된 지 수 년 후 김세태(金世兌, 1685~1753)의 아우 김세화(金世華)는 숙종 45(1719)에 한양에서 격쟁(擊錚)을 했다. 당시 좌부승지(左副承旨) 황귀하(黃龜河)가 동궁이었던 세자(후에 경종)에게 이런 김세화의 일을 보고했다.

"일찍이 선조조(先祖朝)에 김만일(金萬鎰)1만 필의 말을 바친 공로로 산둔감목관(山屯監牧官)을 세습(世襲)하도록 허락하였는데, 그 후 자손 가운데 더러 불초(不肖)한 자가 있어 목졸(牧卒, 테우리)을 가혹하게 부리는 바람에 원고(怨苦, 원망과 괴로움)를 초래하여 본시(本寺;사복시)에 정소(呈訴, 고발장)하는 데 이르니, 그 세습을 폐지하고 정의 현감(旌義縣監)이 감목관을 겸임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만일의 자손 김세화의 격쟁으로 인하여 사복시(司僕寺)에서 제주에 그 편부(便否)를 물었으므로, 이러한 장문(狀聞)이 있었던 것이나, 이 일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사사로운 이해(利害)가 없다면 그가 어찌 바다를 건너 천 리의 먼 길에 와서 격고(擊鼓)하는 데 이르겠습니까? 이 일은 시행하지 않게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세자가 그대로 따랐다.

산마감목관직의 폐지는 분명 김만일 일가의 정치경제적 입지를 흔드는 큰 위기였다. 그러나 김세화(金世華)가 격쟁을 하는 등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경종 원년(1721) 8~14여 년 만에 비로소 산마감목관직을 다시 되찾아 김세화의 형 김세태가 그 감목관이 돼 조상들의 명예를 다시 세웠다. 김세화 또한 후에 형의 뒤를 이어 산마감목관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고종 30(1895)에 마지막 산마감목관 김경흡(金景洽) 때 이르러 경주 김씨가의 자진 청원에 의해 마침내 210년 동안 이어지던 산마감목관직이 완전히 폐지가 되었다. 경주 김씨가에서 배출한 산마감목관은 현재 92회에 83명이 역임한 명단이 알려지고 있다.

 

김진혁 무덤의 귀부하엽형 비석
김진혁 무덤의 귀부하엽형 비석

김진혁 무덤

김진혁 무덤은 서귀포시 토평동 과수원 가운데 있다. 이 무덤의 산담 또한 지난날의 김만일 가의 위세를 보여주고, 집안의 영화(榮華)를 자랑하는 듯 규모가 상당히 크다. 묘비에는 선략장군 행 산마감목관 김공 영인 오씨 지묘(宣略將軍行山馬監牧官金公 令人吳氏之墓)라고 써 있다. 비석은 원래 조선 초기 양식인 귀부하엽형(龜趺荷葉形)으로 아마도 합장 시 고비(古碑)의 형식을 따른 것 같다. 선략장군(宣略將軍)은 종4품 하계이면서 산마감목관(6)보다 품계가 높아 행수법상 을 쓴 것이다. ‘는 그 반대가 된다.

김진혁(金振爀,1637~1712)은 경주(김녕) 김씨로 산마감목관 사종(嗣宗, 1615~1671)의 아들이자 자헌대부(資憲大夫) ()의 손자이다. 사종에게는 숙부인 청주 한씨(韓氏) 사이에 53녀가 있다. 5남을 보면 장남은 진욱(振煜), 둘째 아들 진환(振煥)은 일찍 죽고, 셋째가 진혁(振爀), 넷째가 진엽(振燁), 다섯째가 진웅(振雄)이다. 3녀는 세보(世譜)에 없어 알 길이 없다. 김진혁은 1637년에 태어나서 향년 76세를 일기로 1712년 정월 16일에 돌아갔다. 부인은 군위(軍威) 오씨(吳氏)로 벽사찰방 오익위(吳益渭)의 딸이다. 부인 오씨는 이미 기유년(己柳年,1699) 동짓달 27일에 생을 마쳤는데, ()은 홍로리(烘爐里) 남쪽 서북방향에 부인 옆에 쌍분(雙墳)으로 171249일에 장례를 지냈다. 김진혁과 군위 오씨 사이에 37녀를 두었는데 장남이 시백(時白)이고, 둘째가 시영(時英), 셋째가 시택(時澤)이다. 큰딸과 딸 하나는 광산 김씨 집안에 출가했고, 나머지 딸들은 나주 김씨 집안에 둘, 강씨 집안에 둘, 김해 김씨 집안에 딸 한 명이 출가했다.

김진혁의 무덤은 홍로리의 음택이 좋지 않아 신축년(辛丑年, 1781)에 쌍묘를 토평동으로 이장하여 부부 합장을 했다. 묘비는 숭정(崇禎)후 갑오년(甲午年, 1834) 51일에 유학(幼學) 고만내(高萬內)가 지었다.

김진혁의 산담은 집안의 위세를 느낄 수 있게 크고 우람하다. 부부의 봉분을 중심으로 마치 작은 성을 쌓은 듯 겹담 안에 잔돌을 채웠다. 산담의 측면 길이는 26m에 달하고, 산담 앞면 길이가 24m, 후면이 21m나 된다. 산담 좌측면에 올레를 튼 후 산담 안팎으로 섬돌을 놓았다. 특히 산담 후면에는 측면 산담보다 약 40cm 턱을 높여 북현무(北玄武)의 풍수를 보했다. 산담의 높이는 산담 앞면으로 올수록 120cm 170cm이다. 최근 산담 후면이 주변 공사장의 진동으로 지면이 움직인 탓에 무게를 견디지 못해 무너지고 있었다. 지절(階節의 제주 발음) 아래로 동자석, 망주석 문인석이 사선(斜線)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동자석은 모두 쪽을 진 동녀상이다. 세상에 자식 사랑하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으며, 자식 또한 부모를 봉양하지는 못하더라도 낳으신 은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부모에게 욕됨을 보이지 않는 것을 오늘 다시 되새길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