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이 열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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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언, 시인·수필가

어느 날 우연히 호박 덩이 하나를 발견했다. 이제 낙과하지 않을 만큼 자라 커다란 잎사귀들 속에 숨어 있었다. 보석을 만난 느낌이었다.

얽힌 사연이 있다. 지난겨울 아내가 시골에서 둥글넓적한 맷돌호박 하나를 얻어 오더니, 부엌 한쪽에 당당히 들어앉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골이 팬 황금빛 자태가 어릴 적 초가지붕 위에 탐스럽던 시간을 재현시켰다. 마당 구석에서 오전 동안 노란 등을 켜고 벌을 초대하던 모습도 되살아났다.

이미 식재료가 아니었다. 탱글탱글한 몸매가 아름다웠다. 누구도 갈치호박국이란 말을 꺼내지 않았다. 눈 맞춤으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봄을 맞았다. 이럴 수가! 호박은 사그랑주머니로 변해 있었다. 몸속에 들어 있는 씨앗을 흙 속에 묻고 싶은 호박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텃밭에 구덩이를 파고 음식물 찌꺼기나 과일 껍질 또는 채소 부스러기를 버리고 있다. 박토여서 땅심을 키우려는 의도다. 당연히 썩은 호박은 그 구덩이 속으로 버려졌다. 잊은 채 얼마를 지나노라니 모도록이 싹이 올라왔다. 5월 중순이었다. 튼실한 놈 세 개를 골라 텃밭의 알맞은 곳에 부엽토를 깔고 나눠 심었다. 애정의 눈길을 보내니 덩굴이 길게 자란다. 여기저기 꽃을 피워 올린다. 벌들이 들락거린다. 이제나저제나 고대해도 열매는 보이지 않는다.

연전의 일이 떠오른다. 호박 줄기는 무성히 자라고 암수의 꽃은 많이 피어도 결실로 가지 못했다. 탯줄에서 자두만 한 녀석들이 툭툭 떨어져 버렸다. 무슨 병인가 알아보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종묘상들이 이익을 보려고 당대만 결실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한다는 것이다. 각종 터미네이터 씨앗을 판매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 생명을 박탈할 도덕적 권한이 누구엔들 있을까.

7월 초에 두 주먹 크기로 모습을 드러낸 호박은 불임씨앗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생명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어느 아침엔 암꽃이 네 개나 피었다. 수술은 하나인데 암술이 네댓 개가 뭉쳐 있다. 수술을 꺾어 암술에 비벼 주었다. 확실히 가루받이한 결과인지 열매가 자라기 시작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8월엔 하루 세 번씩 둥근 수지 대야에 물을 받고 흥얼거리며 뿌리에 주었다.

식재료라면 시장에서 사 먹는 것이 훨씬 낫다. 물값과 손품 들인 걸 셈하면 비교가 안 된다. 더군다나 팔 물건도 아니다. 내가 왜 이럴까. 단순하다. 자연을 통해 생명의 신비함을 깨닫고 존중하기 위함이다.

요즘 낮은 출산율에 대해 걱정하는 소리가 크다. 적지 않은 예산을 투입하고 정책을 펼쳐도 현저히 달라질 것 같지 않다. 일자리와 주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먹고 살기 힘든데, 교육비는 어쩌라고, 결혼은 선택 사항인데…. 걸림돌이 어디 한둘인가. 그래도 생각해 봐야 한다, 잘 안 보일 땐 극단으로. 인간이 인간이란 생명체보다 앞세울 게 무엇일까. 사람이 없는 지구별은 이미 지구별이 아니다. 어느 시인처럼 이름을 불러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맨 먼저 달린 호박은 위쪽으로 노란색이 물들기 시작했다. 태풍 솔릭으로 잎이 많이 찢겼지만, 가을의 기운을 받으며 익어 갈 것이다.

나는 힘닿는 한 매년 이 호박씨를 심으며 생명을 이어 주려 한다. 아이들에게도 씨앗을 전해 주고 싶다.

생명, 표절할 수 없는 그 신비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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