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황민화 교육에 거센 반발…농업학교 학생들이 주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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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칠종, 남로당 지도원·조직부장
고태리, 제주농업학교 항일운동
고태문, 호국 용사…884고지 탈환
고태보, 남부록사·사복판관 역임
고태영, 연대 의학 박사·개업 의사
사진은 3년제 제주공립농업학교이던 1938년의 수업장면이다. 제주공립농업학교 학생이였던 고태리는 홍계표, 양두옥, 고운석 등과 함께 학생 제1차 항일 활동을 펼치며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과 학교 당국의 황민화 교육에 대한 반항심을 표출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사진은 3년제 제주공립농업학교이던 1938년의 수업장면이다. 제주공립농업학교 학생이였던 고태리는 홍계표, 양두옥, 고운석 등과 함께 학생 제1차 항일 활동을 펼치며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과 학교 당국의 황민화 교육에 대한 반항심을 표출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고칠종高七鍾1921(일제강점기)~?, 남로당 조직부장, 제주농업중(6년제) 교사, 제주읍 이호리 오도롱-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로당 애월면 특별지구 지도원, 남로당 도당부島黨部 이종우李鍾祐(대정)의 후임 조직부장을 지냈으며 제주농중濟州農中 학생들에게 남로당의 외곽 전위前衛조직을 확대하는 소기의 목적을 이루도록 기여했다.

그는 동요 교사들보다 조직력에 돋보였다.

앞서 강창우姜昌祐(대흘이시형李蓍珩(애월김학림金學琳·한병택韓秉澤(조천) 등과 함께 민주청년동맹(民靑)의 후견자 노릇을 했으며, 조직과 선전에 수완을 보여 구국투쟁위원회 선전부장 등 다방면에 걸쳐 활동했다.

그는 시내 학생들(제농, 교양, 오현중, 제주중, 제주여중)의 양과자洋菓子 반대운동과 친일파親日派 숙정肅正운동 및 비밀 점조직點組織을 전개했다.

1947418일 제주경찰감찰청 특수수사과는 교사 고칠종을 수감하고 남로당원 12명을 체포해 취조했다.

고칠종은 1948년 민주주의민족전선(: 民戰)의 전위대前衛隊로서 민청으로 하여금 제주3·1시위운동을 전개하는 데 앞장서게 했다.

고태리高泰利1912(일제강점기)~1932,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1차 항일활동. 고창주高昌周4, 한림읍 귀덕리<복덕->에서 태어났다.

193137일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앞서 1929113일 전남 광주에서 학생 운동이 거세게 폭발해 1930년 한 해는 전국적으로 학생 운동이 파급됐다. 제주도에는 일제 당시 중등학교로는 제주공립농업학교만이 있을 뿐이었다. 이 학교의 재학생들도 이런 분위기에 휩싸여 어수선했다.

이에 홍계표와 함께 고태리(20·귀덕), 양두옥, 고운석高雲石(23·조수), 현도선玄道善(21·하도), 김두진金斗珍(20·두모), 신찬익申璨翊(20·대림) 등은 일제히 교무실로 들어가 모든 공공 기물을 던지며 또 양치삼梁致三(21·대림) 등은 교장실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박살내었다.

이는 일본인에 대한 적개심과 학교 당국의 황민화皇民化교육에 대한 반항심의 발로였다. 정부에서는 1995년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필자의 변 : 나와 함께 제주농업중학교 4년을 나온 동창 제주신문기자 고영기高永璂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네가 연재하는 <제주에서 벌어진 일본침략日本侵奪과 저항抵抗>을 잘 읽는다. 헌데 항일학생운동의 고태리는 나의 숙부인데, 제삿날마다 숙부가 다닌 학교에 어째서 학생 시절 죽었습니까?’ 해도 말도 잘 아니해 주고 쉬쉬 하기만 했다.”라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몰라 하던 것이 책 덕분에 잘 풀렸다는 것이다. 자랑스러운 일인데, 숨겨 죄인시하던 집안 사람들을 이해시킨 경우다.

고태문高泰文1929(일제강점기)~1952(분단시대), 육군 대위, 호국인물護國人物. 구좌읍 한동리<-> 고상봉高翔鳳3남이다.

그는 강원도 인제麟濟지구 펀치-동부 884고지 탈환전투에 참가, 그가 진지를 고수하라는 말을 남기고 전사, 이날 결국 351고지는 적에게 피탈, 다음날 그의 부하 대원들이 고지를 재탈환했다.

전쟁기념戰爭紀念사업회에서는 19954월에 100인의 호국인물 중에 한 분으로 그를 선정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로 1952125일 화랑무공훈장을, 19521021일 충무무공훈장을, 195211201계급 특진 및 19521231일 을지무공훈장을 수여했다.

고태문 대위는 7중대의 선공 소대장으로서 중앙 제1선에서 소대를 지휘하며 용감히 돌진해 나갔다.

그러나 증강된 대대 규모의 적은 모든 화력을 집중해 저항함으로써 일진일퇴의 격전이 반복돼 사상자만 속출했다.

고태문 대위는 우리는 선공先攻소대다. 전 소대원들은 조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부터 나를 따르라!” 하면서 소대의 선두에서 포복으로 적진을 향해 나가니 소대원들도 주저 없이 용감한 소대장의 뒤를 따라 나섰다.

적의 직사直射화기가 불을 뿜는 가운데 적진으로 접근한 1소대는 돌격 앞으로!”라는 고태문 대위의 명령과 함께 처절한 백병전白兵戰을 전개했다.

이때 1대대 전 병력이 돌격을 감행해 고태문 대위가 이끄는 선공소대와 함께 목표인 884고지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다.

1951년 중위로 진급한 후 5사단 27연대 9중대장으로 보직되어 강원도 고성 351고지를 방어하고 있던 고태문은 19521110일 적 2개 중대의 공격을 받아 또 한 번의 혈전을 치러야 했다.

고태문 9중대장은 공격해 오는 적의 제1선을 격파했으나 제2선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백병전으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여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끝내 진지 일부가 돌파 당했다. 199911월에는 제주보훈지청에서 이 달의 호국인물로 발표하고 현양顯揚행사를 거행했다. 고인은 구좌읍 한동리 개인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고태보高台輔생몰년 미상, 문신,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의 셋째 아들로, 벼슬은 남부록사南部錄事·사복판관司僕判官을 역임했다.

1439(세종21) 12월에 임금이 승정원에서 그에게 간원諫院의 직을 주는 것이 어떠한가?”하고 물으니 도승지 김돈金墩이 답하기를 태보의 아버지 득종은 풍도가 있고 인망이 높았으니 마땅히 아들 태보에게도 우대하는 뜻으로 벼슬을 주는 것이 대의大義에 따르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1480(성종11) 6월 이조에 전지하여 그와 조충로趙忠老와 박계성朴繼性 등을 서용하라고 하였다. 이런 내용으로 보아 음직蔭職으로 사복판관司僕判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고태영高太榮1925(일제강점기)~?, 개업 의사, 호 봉산鳳山, 애월읍 하귀리<귀리>에서 사업가 고석찬高碩璨과 어머니 김병생金丙生의 아들로 출생했다.

서울 보성普成고보를 거쳐 19486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 19493월까지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인턴과정을 마치고 서울 시립시민병원 산부인과에서 근무하고 제주도립제주병원 산부인과 과장으로 취임, 19629월에 군의관軍醫官으로 입대, 19633월 예편豫編되었다.

1972년에 연세대학 의대 대학원을 수료, 의학박사 학위를 획득했다. 부인 최순자崔順子와의 사이에는 24녀의 자녀를 두었다. 한때 가족계획협회 제주도지부장직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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