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부귀영화를 털끝만치도 탐하지 않은 청렴한 부자
(93)부귀영화를 털끝만치도 탐하지 않은 청렴한 부자
  • 제주신보
  • 승인 2018.09.05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주 부을라의 후예…슬하에 2남 두어
성품이 중후하고 정직해 따르는 사람 많아
무덤 비석 방부원수형…봉분 용미지절형
한라산 남쪽 완만한 기슭에 있는 부도훈의 무덤. 관리가 잘 된 산담에는 큰 비석과 한 쌍의 동자석이 놓여 있다.
한라산 남쪽 완만한 기슭에 있는 부도훈의 무덤. 관리가 잘 된 산담에는 큰 비석과 한 쌍의 동자석이 놓여 있다.

잘 죽어보세

돌은 깨뜨릴 수 있어도 그 단단한 성질은 빼앗을 수 없고 붉은 돌은 갈아 부술 수는 있어도 그 붉은 색깔은 빼앗을 수 없다. 단단한 것과 붉은 색깔은 그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도 본성이 있으니 그 본성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기에 천성(天性)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의 성품은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지만, 때로 그 천성도 바뀌고 변할 수 있어서 항상 수신(修身)을 하며 나날이 자기가 자기를 경계해야 한다.

본성이 착한 사람은 삶을 잘 알려고 한다. 삶을 잘 알게 되면 죽음도 잘 알게 되고, 그래서 살아있을 때 사람들을 잘 대하고 죽은 이를 소홀히 여기지 않는다.

산다는 것이 죽음을 전제로 한 일이라서 삶이나 죽음이나 귀하기는 마찬가지다.

장례란 인정(人情)을 갖는 것인데 존경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함부로 여기지 않고 잘 묻어주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의 천성이 발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지워버리는데, 옛말에 죽은 사람이 오래되면 오래될수록 산 사람도 그만큼 멀어지고 산사람이 멀어질수록 지키는 사람도 그만큼 나태해진다라고 했다.

세상만사가 맑은 날도 있지만 큰 바람 부는 날도 있다. 자연이 그렇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그렇다.

그래서 인생이란 온갖 일을 겪으며 살아가는 길이고 그것을 거뜬하게 넘어서잘 죽었을 때 비로소 잘 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 살았다는 것은 잘 죽었을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잘 죽는다는 것은 생전에 원한을 풀고 부채도 갚고, 자식들을 잘 키우고 후회나 아쉬움이 없이 편안하게 돌아갈 수 있을 때 자신이 잘 산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간에서 흔히 잘 살아보세라는 말보다 잘 죽어보세라는 말속에 더욱 인생을 잘 살았다는 값진 의미가 들어있다.

고뇌 없는 인생이란 없다. 살아간다는 것이 자연적으로 고해(苦海)를 지나는 것이고 그 어떤 행복한 날이 연이어도 시작과 끝은 있게 마련이다.

그 바다의 끝에는 이 세상에서 만난 모든 것과 헤어지는 이별의 아픔이 기다린다. 자만(自慢)으로 누린 부귀, 영화의 탐욕도 결국 봄날의 꿈에 무너지는 불명예에 불과하다. 그러면 인생의 가치란 무엇일까. 사람은 끝내 잘 죽어야 한다.

 

부도훈 무덤 동자석.
부도훈 무덤 동자석.

기백이 있는 선비 부도훈

한라산 남쪽 완만한 기슭에 지금은 차밭으로 가꾸어진 곳에 품격이 느껴지는 무덤이 있다.

관리가 잘 된 산담에 키가 큰 비석 하며, 한 쌍의 동자석이 볕 아래 여유롭다.

산담 너머 좌측에 세워진 비석에는 절충장군전행첨지중추부사부공지묘(折衝將軍前行僉知中樞府事夫公之墓)’라고 돼 있다.

무덤 주인은 제주 부을라의 후예로 이름은 도훈(道勳)이다. 생은 영조 신유년(辛酉年, 1741) 29일이고, 계유년(癸酉年, 1813) 922일 향년 73세로 돌아갔다.

무덤은 동년(同年) 1218일 수성산(水星山) 자좌오향(子坐午向, 남향)에 만들었다. 비문은 전() 성균관 직강(直講) 고명학(高鳴鶴)이 지었다. 고명학은 변경붕, 부종인과 같은 해에 급제해 찰방에 제수됐으나 나이 드신 부모의 공양으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도훈의 아버지는 부행충(夫行忠)이고, 어머니는 진주(晋州) 강씨(姜氏)로 무과(武科)에 급제한 강시웅(姜時雄)의 딸이다.

부도훈의 부인은 제주 고씨로 통덕랑(通德郞) 고한청(高漢淸)의 딸이고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종인(宗仁)과 종례(宗禮)가 그들이다. 큰 아들 부종인은 정조 때 대정현감을 지낸 청렴한 인물이다.

부도훈은 성품이 중후하면서도 기운이 맑고 생김새가 빼어나고 사람들로 하여금 우러름을 받았다. 하는 일마다 명확하고 정직했다.

항상 조상을 잘 받들면서 예의와 법식을 따랐다. 업무를 행할 때에도 언제나 예로써 성의를 다하여 사람을 만나도 화를 내는 일이 없었다.

항상 바르게 살면서 자신에게 약간의 그릇됨도 없이 엄격했다. 시를 주고받을 때도 마음을 열어 성심을 다해 온정 어리고 따뜻한 것이 봄바람이 부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슴속은 바다같이 넓어 허전한 일도 잘 풀어주었다.

부귀와 영화도 그것이 불의에 어긋난다면 털끝만치도 탐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교만하지 않았고, 항상 그릇된 말에 집착함이 없이 경의(敬義)가 없으면 따르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한 시대의 어른으로 추앙받았다. 부도훈은 매우 청렴하고 꼿꼿한 선비였다.

부도훈의 무덤은 전형적인 제주의 산담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봉분을 기준으로 상석 좌측에 비석이 측면으로 세워져 있다.

비석의 전장은 124, 두께는 16이다. 비석 상단 넓이가 50이고, 하단이 43로 하단부가 조금 좁다.

비석 모양은 월두형이지만 통틀어 방부원수(方扶圓首)라고도 한다.

산담의 올레 또한 남자 무덤이어서 좌측으로 길을 텄다. 올레 넓이는 50~60정도로 산담마다 약간의 편차가 있다.

올레의 정돌은 소실되었는지 올려놓지 않았다. 올레 바닥은 자갈을 평평하게 깔아 놓아 조상이 편하게 다닐 수 있게 했다.

산담은 좌우 겹담 사이에 잔돌로 가운데를 채웠다.

산담 앞면의 길이가 17.5m, 넖이는 240m, 높이는 120이고 앞면 산담 양 끝이 약간 올라갔다.

산담 측면 길이는 17.6m, 측면 산담 높이는 80~90이다. 산담 넓이는 좌우 측 모두 230이다.

또 산담 후면 길이는 13.2m, 후면 높이는 5도 정도의 경사각 때문에 30에 불과하다.

봉분은 용미지절형으로 지름이 5m이고, 용미가 2.5m이다. 봉분 높이는 세월이 흘러 120정도이다.

산담 좌측에는 토신단은 없고, 상석, 조면암 향로석이 있으며, 현무암 지절이 있다.

동자석은 좌측 동자석 전장이 72, 넓이가 27, 두께 21로 손에는 긴 홀을 들고 댕기머리를 하고 있다.

댕기머리는 양각 새김 위에 음각선으로 땋은 머리를 표현했다. 우측 동자석 전장은 69이고, 넓이 27, 두께 20에 두 기 모두 조면암으로 만들었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자리에 놓이는 국화꽃.
고인의 명복을 비는 자리에 놓이는 국화꽃.

부도훈 큰 아들 대정현감 부종인

김석익(金錫翼, 1884~1956)은 부도훈의 큰 아들 부종인(夫宗仁,1767~1822)을 다음 같이 짧은 문장으로 정리했다. “부종인의 자는 자량(子諒)이며 정의현 사람이다. 정조(正祖) 갑인년(甲寅年)에 대책(對策)으로 등재(登第)하여 벼슬이 성균관 사성(司成, 3)에 이르렀고, 서울과 지방에서 관리로 일할 때에는 청렴하고 능력이 있다고 칭찬받았다. 일찍이 대정현령으로 있을 때는 학문을 일으키고 선비를 권장하여 지금도 백성들이 칭송하고 있다.”

이를 두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부종인이 대정현감 재직 시 대정서당을 대정현성 동문에 있는 동계(桐溪) 정온(鄭蘊, 1569~1641) 유허지(遺墟址) 곁으로 옮기고는 이름을 열락재(悅樂齋)’라고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