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서는 노인을 어른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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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초빙교수/논설위원

우연히 어머니의 이름으로 된 가족관계증명서를 보았다. 언제나 내 부모의 자리에 있어 온 어머니가, 원래는 누구의 딸이란 게 사뭇 낯설었다. 96세 어머니도 아기였던 기록에는 울컥하니 목구멍이 메었다. 나는 왜 어머니가 아기구덕에 누워서 어머니의 웡이자랑을 들으며 자랐다는 사실을 꿈에도 몰랐을까?

그래서인지 요즘 들어 어머니가 다시 아기가 되었다. 아침마다 기저귀를 갈아드리면, 그저 ‘고맙다’고 하신다. “니랑 늙지 말라”는 어머니의 가슴엔 딸이 없는 내가 더 걱정이다. 어머니는 10명을 낳아서 20년 동안 기저귀를 빨았다. 그럼에도 당신의 기저귀가 미안하신 분.

늙지 않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만, ‘질병과 결함, 흐릿해지는 사고력, 굳어가는 육신, 많은 고통’으로 묘사된 헤르만 헤세의 노년은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인생 행로다. 그에게는 노년의 모든 증상을 길고 지루한 밤에 겪어야 하는 게 씁쓸하다. 인간에 대한 성찰로 노벨상을 수상한 작가에게도, 노년은 사정없이 인생의 그늘을 드리운다. 더욱이 어머니가 겪는 밤은 지루함에다 두통이나 오한, 근육통 등이 수반되어 설움을 더한다. 그 밤을 함께 겪다보면 늙음에 대한 생각으로 가슴이 저려온다. 노년이 행복할 수는 없는 것일까?

지난 여름, 세기의 더위를 피해 인천공항까지 피서를 간 노인들에게 매스컴이 보여준 싸늘한 시선. 행복과는 분명 거리가 멀다. 오죽하면 ‘늙어서 미안하다. 너희들은 절대 늙지 마라.’는 댓글이 현 사회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맨얼굴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였을까.

우리나라는 2017년 8월 말을 기해서 인구 100명 중 65세 이상 노인이 14명을 넘어섰다. 고령사회다. 제주도는 고령화율이 14.09%로, 전국 5위에 올랐다. 제주시는 12.79%로 비교적 젊지만, 서귀포시는 17.62%로 한참 늙었다. 때문에 서귀포시노인회는 올해부터 ‘노인이 되지 말고 존경받는 어른이 되자’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고집불통에다 변덕스럽고 이기적인 늙은이가 되지 말고, 자식들에게 짐이거나 사회에 부담스런 노인은 더욱 안 된다’는 노인회장의 훈시에, 회원들의 얼굴이 비장해진다. 강연자를 향해 ‘앞으로 어찌하면 좋을지’를 묻는 눈빛들도 자못 간절하다.

「서울에 사는 노인들은 일찍 일어나도 무료하니까, 무료 지하철을 타고 시외로 나갑니다. 인천행 지하철은 출퇴근 시간에 초만원으로 유명하지요. 그런데 올 여름은 100년 만에 찾아온 폭염이라, 무더위에 약한 노인들이 시원하다는 공항으로 몰렸습니다. 지하철과 공항 이용객들이 불편할 정도라서, ‘오죽이나 무덥고 힘들면 그랬을까’ 이해하는 한편에선, ‘노인들은 가정교육을 못 받은 세대라서 무례하다’는 비판도 일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취직도, 연애도, 결혼도 포기한 3포 세대가 아닙니까. 그런데 취직이 되자마자 5명이 1명의 노인복지를 책임져야 한답니다. 올해는 그 부담액이 약 160만 원 정도입니다.」

돈 얘기가 나오자 노인들의 눈빛에 비애가 서린다. 궁핍한 시대에 태어나서 가난과 전쟁의 혹독함을 겪으며 평생을 일만 해 오신 분들, 그럼에도 ‘오몽만 해지민(움직일 수만 있다면) 혼자 살아사주게’라며 자식에게 기대지 않는 어른들. 이 특별한 제주인들에게 ‘노인이라 하지 말고, 어른이라 부르기’를 제안한다. 나이 듦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야말로 노년의 행복이 아니겠는가. 시몬느 드 보봐르가 역설한 바, ‘노인들의 지위는 스스로 획득되지 않고 부여되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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