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한 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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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기 시인

하루가 다 저물지 않은 보성시장.

국밥집은 아직 손님이 많지 않아 한산했다.

근 3년 만에 우연히 만난 K형과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마주 앉았다. 머리고기 한 접시를 시키자는 걸 부득 막으며 국밥 두 그릇을 시킨다. 국밥 한 그릇이면 막걸리 서너 병 마셔도 남는다며. 근황을 묻기도 전에 양은 막걸리 잔에 넘치도록 가득 따른다. 한 손으로 마시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란다. 쏟아질까봐 두 손으로 공손하게 들고는 술잔을 마주쳤다. 목말랐던지 K형도 나도 한 잔을 쭉 마셨다. 역시 막걸리는 제주막걸리라고 추임새를 넣고는 국밥에 내장을 건져 소금에 푹 찍고는 한입 가득 맛있게 먹는다. 참 세상은 이렇게 달기도 한 것이던가.

대학 2년 선배. 학교 다닐 때는 쫓아다니며 술을 많이 얻어먹었던 1968년이 생각난다. 낭만이라며 아나고에 밀가루 막걸리를 어지간히 강요하던 K형의 머리에도 서리가 내리고 있었다. 지금껏 살아보니 작은 것 하나에도 정성이었다며, 그랬더라면 실패하지 않았을 것을 지금에야 후회 한다며 막걸리 한 잔도 꼭 두 손으로 정성껏 마시란다.

막걸리 세 병을 마시고 보성시장을 나설 무렵은 이미 해는 지고 어둠이 내려 앉아 있었다.

한 잔만 더 하자는 나를 뿌리치고 손 들고 돌아서는 형의 모습에 고된 삶이 녹아있었다.

정말 멋진 형이었는데 건설업의 때를 제대로 만나지 못해 어렵게 살아가는 모습이 못내 안쓰러웠다. 그러나 떳떳했다. 어느 누구에게도 사정하지 않고 분수에 맞게 사는 게 즐겁다고 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시 한 수를 그냥 풀어냈다. 제목에서부터 마칠 때까지 한 글자도 고치지 않고 이렇게 썼다. ‘막걸리 한 잔’

‘막걸리 한 잔에도 세상이 녹아있다// 보성시장 국밥집/ 사발 가득 따르며// 꼭, 두 손/ 받들어 마시게 하는/ K형의/ 인생 한 수’

어쩌면 인생은 작은 것 하나에 들어 있는 삶의 진리를 찾아내는 과정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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