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손맛
어머니 손맛
  • 제주신보
  • 승인 2018.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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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희, 수필가

여름을 보내는 동안 그리운 사람 기다리듯 간절하게 비를 기다렸다. 매일 이어지는 불볕더위에 일상생활이 마치 엿가락 늘어지듯 균형을 잃었고, 입맛은 고약하리만큼 써 뭘 먹고 싶다는 욕구조차 일지 않았다.

이럴 때는 깔깔한 입맛을 당기는 게 시원한 냉국이다. 속에서 갈증으로 허덕일 때마다 냉국 한 대접이 절실한데, 속탈로 먹고 싶은 것을 참는다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느끼며 한여름을 보냈다.

제주에 산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오이냉국이며 자리물회에 맛 들인 지 오래지 않다. 남편에게 맛있게 잘 만들었다는 칭찬까지 들었지만 내 입맛에는 당기지 않았다. 친정집에선 국이나 찌개는 푹 끓여 깊은 맛으로 먹었다. 제주 음식은 끓는 물에 살짝 데치거나 날것으로, 특별한 양념 없이 재료 본래의 담백하고 신선한 맛을 즐겨 먹는 식문화가 낯설었다.

몇 년 전 추석을 앞둔 벌초 때의 일이다. 땡볕에서 풀을 베고 거들다 얼음물에 오징어와 오이를 넣고 된장을 푼, 시원한 냉국 한 모금이 갈증을 순간에 가라앉혔다. 여름철 땀 흘리며 밭일을 한 후에 물을 대신해 먹기도 했다는, 가까이하지 못했던 음식에 반해 새로운 맛을 알게 됐다. 된장을 찬물에 풀어 간단하게 국을 만들어 내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구미가 당기지 않았었다. 오래전부터 제주인에게 사랑받는 여름철 별미 토속음식으로 자리한 까닭을 이해할 수 있었다. 비로소 제주 사람으로 살 자격을 갖춘 것 같았다.

남편이 시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을 그리워할 때면, 나도 친정어머니의 풋고추 송송 썰어 끓인 강된장 찌개가 그립다. 남편은 여름철이 돌아오면 어머니 표 자리물회 타령을 한다. 억센 가시를 성가셔해 시어머니 솜씨를 가늠하며 자리를 회처럼 포를 떠 물회를 만든다. 번갈아 오징어를 얇게 썰어 갖가지 채소에 곁들인 냉국을 식탁에 올린다. 어머니의 손맛에서 아내의 손맛으로 길들여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며, 멀리 사는 아이들을 떠올리곤 한다. 내가 맛있게 먹기 시작할 즈음부터 자리가 귀해졌고, 덩달아 값이 비싸진 게 아쉽다.

기후 변화로 자리 떼가 제주 바다를 이탈하는, 어쩌면 성장한 자식들이 스스로 살 곳을 찾아 떠나는 이치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젖을 떼고 곡기를 먹기 시작하면서 느끼고 맛본 첫맛이 평생을 간다고 한다. 미각이 발달한 미식가들이 맛있는 음식을 찾아 즐기는 일도 일종의 쾌락이다.

어머니의 음식은 대대로 그 집안만의 내림 음식이 된다. 해가 갈수록 고향의 맛이 그립고, 맛깔스럽고 담백했던 토속음식인 어머니가 차려주셨던 밥상이 눈에 선하다. 몸이 아프거나 입맛이 없을 때, 소박한 한 끼가 지친 심신을 훌훌 털고 일어날 것 같이 허기진다. 그만큼 어머니의 음식은 보약이나 다름없다.

곧 추석 명절이 다가온다. 찾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타지에 나가 살던 자식이나 친지들이 귀성한다. 모처럼 한자리에 모여 고향 품에 안길 시간이다. 객지에서 외롭고 힘들었던 일이 있다면, 물회처럼 갈증을 시원하게 풀어내 위로받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고향은 변함없이 푸근하게 맞아주는 어머니의 품 같은 휴식처다. 그곳에는 어떤 진수성찬보다 더 따뜻하고 정성이 담긴, 어머니 손맛이야말로 팍팍한 삶을 살찌게 하는 영양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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