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에서 사흘 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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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오사카에서 맞은 이튿날 아침, 처제 게이코(景子)를 만난다. 자매간 40년 만의 해후가 이뤄지고, 그 길로 장모님 묘소에 참배하는 일정이다. 주소를 보이면 택시기사가 찾아 줄 거란 믿음이 있다. 엊저녁 식당을 안내해 준 젊은 여인을 떠올렸다. 그녀는 친절한 일본인의 심벌로 이미 머릿속에 각인됐다. 어느 나라 국민이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란 의식으로까지 확산돼 있다.

일찍 일어나 씻고 뷔페로 조식을 해결했다. 뷔페도 일본인들의 담박한 취향이 녹아 있어 유럽 여행에서 먹었던 기름진 육식과는 대조적이다. 백반 말고도 밥에 카레를 얹은 것도 있고, 구수한 된장국은 일찌감치 공감한 미각이다. 고구마 감자를 곁들인 요리도 별스럽다. 계란말이가 나오는데 삶은 계란이 있는 등 세분화한 게 눈길을 끈다. 낯선 길 위에 서게 된다. 예측이 불확실한 날이라 배를 단단히 채워 뒀다. 하긴 여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먹는 즐거움이다.

호텔 앞에서 택시가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기사가 가방을 받아 트렁크에 실어 준다. 꿈쩍 않고 앉아 있는 우리와는 다르다. 기사가 짧게 영어를 구사해 아들과 입을 트니 안심이다.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주소를 보면서 잘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밝은 표정으로 자신한다.

한참 후, 이면도로로 접어든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더니 차를 세운다. 좁은 공간으로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나타났다. 처제였다. 자매가 끌어안고 재회의 감격을 나눈다. 30줄에 잠시 만났다 70줄, 시간이 많이 흘렀다. 나도 처제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초대면의 기쁨을 나눴다.

장모님 묘소는 봉분이 없는 납골묘였다. 처제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절 한쪽 마당에 조성된 가족묘, 300여 기쯤 될까. 좁은 곳에 집약된 느낌이 들었다. 묘소 앞에 섰다. 정면에 ‘片岡家族之墓’라 했고 측면에 함자가 새겨 있다. 여고 시절 어린 나이에 돌아간 처제의 작은딸 유골도 외조모와 함께 봉안해 있다. ‘片崗’은 남편의 성 씨(方)다. 가족들을 뒤이어 봉안할 수 있게 기단 밑으로 공간이 마련돼 있다 한다. 일본다운 축소지향의 구조다.

처제가 양동이에 물을 떠다 대리석으로 덮은 묘를 씻고 걸레질 한 뒤, 준비한 과일 쟁반을 올린다. 몽당연필 크기의 초 두 개에 불을 켠다. 우리 넷이 나란히 서서 고개 숙였다. 아내의 오열에 폭염도 멈칫한다. 우리는 애초 당신의 부음을 듣지 못했다. 처제가 모시다 돌아가시자 장례를 치르며 언니에게 알리지 않았다. 바다 건너 먼 길 오게 하지 않으려는 배려에서 냉정히 결단한 것. 한참 지난 뒤 가슴을 쓸어내렸던 아내다. 이제 당신 영전에 선다고 저지른 업보가 씻기랴, 나도 가슴 먹먹한데.

처제의 1남 2녀와 우리, 두 가족이 두어 시간 점심을 함께했다. 화중에 처제가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사실에 놀랐다. 일본에서 조선인으로 살려면 불이익이 많다는데 어떻게 헤칠까. 시가 ‘片岡’ 집안에 모국을 품는 무슨 내력이 있을 법도하다.

바쁜 사람들이다. 힘들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점심 후, 처제와 작별을 서둘렀다. 우리는 한 사람씩 손을 잡아 가며 아쉬움을 나눴다. 처제 아들이 내게서 이모부를 느꼈을까. 먼저 손을 내밀매 힘줘 꼭 잡아 줬다. 손을 흔드는데 택시가 저만치 미끄러진다. 한국어를 모르는 아이들에게 마지막 남긴 말은 ‘사요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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