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풍수지리에 능통…세상은 그를 석학이라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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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홍진, 이원진과 ‘탐라지’ 완성해
고효원, 정의현감…강우량의 후임
고후, 신라 때 입조…성주 작위 받아
고후길, 한동리 3인걸·한의학 명의
1970년대 말에 포장 준공된 일주도로 제주시 이호동 ‘덕지답’ 구간의 모습. 탐라순력도에 나타난 마을 표기에서는 해안과 접한 이호1동 근방은 가물-개, 이호2동 주변을 오도롱이라고 표시했다. 탐라지를 감교한 고홍진은 향리인 제주시 이호동 오도롱에서 향리 자제를 모아 훈학에 힘써 유능한 인재를 양성 배출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70년대 말에 포장 준공된 일주도로 제주시 이호동 ‘덕지답’ 구간의 모습. 탐라순력도에 나타난 마을 표기에서는 해안과 접한 이호1동 근방은 가물-개, 이호2동 주변을 오도롱이라고 표시했다. 탐라지를 감교한 고홍진은 향리인 제주시 이호동 오도롱에서 향리 자제를 모아 훈학에 힘써 유능한 인재를 양성 배출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고홍진高弘進1602(선조35)~1682(숙종8), 문신. 일명 고봉래高逢萊 또는 고전적高典籍. 자는 퇴이退而, 본관은 제주이며 제주시 이호 가물-마을에서 고정순高定舜3남으로 태어났고, 제주시 이호2오도롱’ 886번지의 집터에 살았다.

고홍진은 1618(광해군10)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해온 간옹艮翁 이익李瀷의 문하에서 명도암 김진용金晋鎔과 글을 배웠다.

17세 소년으로 정주학程朱學을 수학하고 아울러 지리학을 탐구해 감여술堪輿術에까지 능통하니 세상에서 석학이라 칭했다.

1653(효종4) 8월에 효종 때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원진李元鎭이 편찬한 탐라지는 고홍진의 감교監校를 거쳐 완성됐다.

앞서 이원진이 고홍진의 재주를 인정하고 서울에 사는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에게 소개했고, 고홍진은 반계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이는 목사 이원진이 반계 유형원의 외숙이며 스승이기 때문이어서 쉽게 이룰 수 있었다.

그래서 간옹과 반계 밑에서 정주학程朱學·사서·지리학 등을 배워 감여술堪輿術(풍수지리)을 탐구했다.

태호太湖 이원진이 제주를 떠난 후에는 김진용과 어울려 학론學論과 시음詩吟으로 교유했다. 곧 성균관 전적을 배수하고 수년 후 귀향했다.

이원진李元鎭은 탐라의 서적 등 모든 문적이 안무사 겸 목사 최해산崔海山 재임 당시인 1435년 관부화재官府火災로 소실된 후 편찬되지 않아 탐라의 사적史籍이 없음을 개탄해 고홍진에게 탐라지 편찬을 의뢰했다.

고홍진은 이를 수락하고 고려사와 각종 문헌과 사기史記 등을 깊이 탐구해 탐라 건치연력建置沿革의 삼을나三乙那 순서를 고을나·을나·을나로 밝혔다.

또한 탐라 전역을 답사해 형승·산천·지형·지질·지리 등을 관측한 편집 자료를 수집蒐集하고 역사·지리·풍속 등을 총망라해 상세하고 정확하게 체계적으로 수록, 제주를 소상하게 알 수 있는 역사적인 공증公證 문헌으로 2년 여의 노고 끝에 이를 편저했다.

52세 때인 16538월에 출판했는데 발문跋文은 교수 신찬申纘의 찬이다.

1664(현종5) 문영후文榮後, 문징후文徵後 종형제와 함께, 전시에 직부하게 되어 1666년 식년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 1675(숙종1) 제주목사 소두산蘇斗山이 재임 8개월 동안 서로 교유했다. 고홍진은 말년에 향리인 제주시 이호동<오도롱>에서 향리 자제를 모아 훈학해 유능한 인재를 양성 배출하며 가물개 고선생이라고 불리었다.

 

고홍진高弘進의 묘비.
고홍진高弘進의 묘비.

고홍진은 아들 상필尙佖·상흘尙屹·상간尙侃 3형제를 두었고 손자 중에 찬은 좌승지, 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지냈고 증손에도 만춘萬春은 강원감사어사江原監司御使, 만첨萬瞻은 해남현감·평해군수, 만갑萬甲1등공신 고원군수高原郡守 등 문무에 현달한 후손이 매우 많았다.

그는 168281세에 서거, 천수天壽를 다했다.

소목사蘇牧使는 그를 극찬해 도안道眼이라고 했고 도내 풍수지리에 관한 현지답사와 논의가 있었는데 많은 일화를 남겼다.

또 무당에 의해 전해오는 고전적 본풀이가 오늘의 신방에 의해 행해진다.

흔히 탐라의 사절四絶이라 하여 첫째 풍수로는 고전적高典籍(弘進이호), 둘째 의술로는 진좌수秦座首(國泰명월), 셋째 복서卜筮로는 문곡성文谷城(榮後어음), 무술로는 양보성梁寶城(有成거로) 등 네 사람을 지칭했다.

고효원高效元정의현감. 17248, 강우량康遇諒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72512월에 떠났다.

고후高厚탐라국 시조 고을나高乙那15대손(일설에는 12대손).

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삼형제가 바다를 건너 신라의 탐진眈津(지금의 강진康津)에 이르렀다.

이때 객성이 남쪽에 나타났으니 태사太史가 아뢰길 이국인이 내조상來朝像이라 했다. 과연 고후 등이 내조하니 신라왕이 고후에게는 성주星主,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계제季弟에게는 도내都內라는 작위를 주었다.

또 국호를 탐라라 하니 신라의 탐진에 처음 도착했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어졌다.

이 고후 등 삼형제는 신라에서 돌아와 처음 건입포에 상륙하니 대촌大村(지금 제주시내)이 탐라국의 고씨를 정점으로 왕권 전제정치가 시작되었다.

고후가 신라에 입조한 시기를 고려사에는 신라성시新羅盛時라 했다. 향토사가 김태능金泰能은 신라 내물왕奈勿王(356~401) 말경에서 눌지왕訥祗王(417~457) 때까지로 보고 있으며 일부 학자 중에는 통일신라시대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고후길(자의공) 비석.
고후길(자의공) 비석.

고후길髙厚吉1848(헌종14)~1931(일제강점기), 한의사, 본관은 제주, 전서典書공파로서 중시조의 33세손이다. 구좌읍 한동리<궤낭->에서 고봉락髙鳳樂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한의로서 인술을 베풀었다.

19세기 중엽 한동리에 허호적고약국김순장이라는 별칭을 지닌 훌륭한 업적을 남긴 3인걸이 있었다.

강릉 정사장鄭師丈이 노자가 떨어져 마침 고후길에 의해 연명을 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말하기를 허경許京에게는 역학譯學과 호구戶口, 고후길에게는 의술을, 김경순에게는 풍수지리風水地理를 공부하도록 했다.

고후길은 한의학漢醫學에 능통해 고약국高藥局으로 불리어졌다.

그가 18862월에 제주목사 심원택沈遠澤의 부인의 급환을 고치니, 일약 명의로 알려지며 한의원을 개설했다. 전설로 전해지듯이 인술仁術을 베풀어. 후대에 자의慈醫공이라 일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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