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사님들께 큰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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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사회자가 엄숙히 목청을 돋운다.

“은사님들께 큰절!” 구령이 떨어지자 이층 홀을 가득 메운 정장한 이들이 일제히 카펫 바닥에, 너부죽이 엎디었다. 원탁과 의자들만 뎅그러니 놓였을 뿐 실내가 텅 빈 것 같다. “바로!” 소리에 일어나 자리에 앉는 70세 노인들의 굼뜬 몸놀림.

지난 9월 28일 저녁. 매종글래드 호텔에서 벌어진 장면이다. 1968년에 졸업한 오현고등학교 16회 동기 현명회가 개최한 졸업 50주년 ‘은사의 밤’에 참석한 200여 졸업생들, 그들이 은사님들을 향해 절을 올렸다. 그냥 절이 아닌, ‘큰절’이다. 큰절은 원래 초례(전통 결혼예식) 때나 시부모를 대할 때, 여자가 가장 존경하는 예를 갖추어 올리는 예도다. 어린 학생도 아닌 일흔이 된 노인들이 그런 절을 한 것이다.

인생무상이라, 반세기 사이에 타계한 은사들이 여러 분이다. 단상에 줄 선 여덟 분 은사에게 기념품을 전달한 뒤 느닷없이 이뤄진 절이었다. 나도 은사들 대열에 껴 있었다. 고2 때 고전을 가르치고 담임을 했던 연(緣)이다. 같이 다녀온 경주 수학여행은 젊은 교사시절에 뚜렷이 남는 추억이다.

교직 마흔 네 해, 사은 행사에 초대 받은 게 어디 한두 번이랴마는, 이런 절 받기는 처음이다. 몇 번인가 스승의 날 운동장에 엎디었던 학생들 절이 머릿속에 각인됐지만 고교생들에게서 받은 것으로, 70세 노 제자들의 절과는 다르다. 이 절이야말로 사람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인사였다. 그들이 바닥에 엎디는 순간, 이렇게 선 채 받아도 되는가 하는 생각에 마음은 이미 바닥에 닿아 있었다.

일 년 뒤 공립학교로 옮기며 그들과는 연이 다했다. 은사 대부분이 동문 선배이고 모교에 오래 근속하는 사립학교다. 더욱이 어간에 만나지 못하고 지냈으니 이번 초대는 내게 각별한 것이었다. 그날 내게 수없이 건네 온 “제주新보 칼럼 잘 읽고 있습니다.”는 인사에 새삼 놀랐다.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큰절이 끝나 훈훈한 분위기에서 행사가 진행됐다. 1억 4천의 모금은 거액인데, 애교심과 집행부 노고의 결실이었다. 적잖은 돈이 모교 발전기금으로, 또 장학금으로 기증됐다. 홍국태 집행위원장이 “은사님들께서 저희와 함께 만세 만만세를 누렸으면 한다.”라고 한 인사말은 일흔 살 제자들의 마음을 충분히 함축해 놓았다.

동문 기업가 블랙야크 강태선 회장이 모교에 발전기금으로 2억 원을 쾌척해 박수가 쏟아졌다. 모교에 거금을 흔쾌히 내놓았다는 것. 블랙야크는 자수성가한 제주 출신 기업인의 표상인 대한민국 아웃도어 브랜드다. 국내는 물론 해외 시장에서도 인사이트를 구축하며 최고의 브랜드로 성장한 기업이다. 돈을 벌수록 아끼는 세상인심인데, 강 회장의 기부는 삭막한 사회에 귀감이 되고도 남는다.

6년 전이다. 강 회장이 제주도문화상 국내재외 부문을 받을 때, 예술 부문을 수상하며 자리를 함께했었다. 그가 소주 한 잔을 권하매, 잔을 돌리며 한 순배 수작했다. 지난여름 폭염 속에 기다려 온 가을만큼 밤이 깊어 갈 무렵, 우리는 한 발 앞서 자리를 비웠다.

‘고비의 황진도 한 줌 먼지며…’ 오랜만에 서툴게 교가를 흥얼거리는데, 어느새 옛 기억 속의 경기장에서 주먹 불끈 쥐고 응원가를 부르고 있었다. “산 높고 물 맑은 오현 옛터에, 한라의 정기 받고 자라난 오현…” 큰절의 여운은 의외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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