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한국 최초 신문학 교수…언론계 개척자로 족적 남겨
(57)한국 최초 신문학 교수…언론계 개척자로 족적 남겨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1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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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후삼, 통감부 순사·제주의 의병
곤생, 신문고 울려 이희태 목사 고발
곤토진지로, 제주도사…측우소 설치
공사검, 을묘왜변 왜구 침입 막아
곽복산, 제주신문 주필  등 역임해
제주지역 최초의 신문인 제주신보는 1945년 10월 1일 창간됐다. 창간 당시 제호는 제주민보. 1946년 1월 26일 김진수가 대표로 취임하면서 제호를 제주신보로 바꾸어 등록한다. 1947년 1월 1일 제주신보사는 주식회사 조직으로 재출발한다. 이 사진은 제주신보가 1962년 제주신문으로 통합 직전 찍은 것으로, 맨 앞줄에는 강민범, 김진수, 강우준, 홍종언, 김용수 편집국장 등, 가운데 줄에는 오동식, 송산실, 고광태, 이원창, 강용삼, 전병기, 김윤옥 등이, 맨 뒷줄에는 김정용, 김종주 등의 얼굴이 보인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제주지역 최초의 신문인 제주신보는 1945년 10월 1일 창간됐다. 창간 당시 제호는 제주민보. 1946년 1월 26일 김진수가 대표로 취임하면서 제호를 제주신보로 바꾸어 등록한다. 1947년 1월 1일 제주신보사는 주식회사 조직으로 재출발한다. 이 사진은 제주신보가 1962년 제주신문으로 통합 직전 찍은 것으로, 맨 앞줄에는 강민범, 김진수, 강우준, 홍종언, 김용수 편집국장 등, 가운데 줄에는 오동식, 송산실, 고광태, 이원창, 강용삼, 전병기, 김윤옥 등이, 맨 뒷줄에는 김정용, 김종주 등의 얼굴이 보인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고후삼高厚三한말 제주의 의병. 통감부 순사, 본관은 제주이며 대정읍 영락리<-둔궤>에서 태어났다.

1905(광무9)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의 세력이 제주까지 미쳐 일진회一進會가 조직되자 대정군지회의 회원이 되었다.

이를 기화로 한말 경찰의 순사巡査로 들어가 식민지통치기구인 통감부統監府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후일 과거의 행위를 뉘우치어 의병장 고사훈(일명 고승천高承天)의 휘하에서 의병 활동에 가담했다.

1909(융희3) 2월 대정군大靜郡에서 의병 항쟁이 일어나자 마침 그는 전년 5월경 민사 소송 건에 관계되어 경찰에서 해임된 때이다.

구석왓(일명 九石田, 현 구억리)에서 동지를 규합하던 중 경찰의 쏘는 총탄에 의해 의병장 고사훈이 순국하면서 지휘부를 잃자 그는 성산면 시흥始興(=심돌)리로 숨어버렸다.

이때 제주경찰서의 일본인 순사 시모하라<下原新藏>와 제주 순사 강태수康泰洙에게 체포됐다.

곤생困生()관기官妓(관청官廳에 딸렸던 기생妓生), 곤생昆生은 숙종 때의 제주 관기로 한양으로 올라가 신문고申聞鼓를 두드려 제주목사 이희태李喜泰가 세 딸을 고문으로 죽게 하였음을 고발했던 여성이다.

앞서 이희태 목사는 첩과 그 자식을 데리고 왔는데 그 자식은 이 목사의 자식이 아니라 전 남편의 자식이었다.

이는 이목사가 자식까지 있는 남의 첩을 빼앗아 데리고 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목사와 첩, 그 자식에 대한 이 소문의 중심에는 곤생과 세 딸이 있었다.

이 목사는 이들 모녀母女를 증오하게 되었고 세 딸을 고문으로 죽게 했다.

이희태 목사는 사사로운 분노 때문에 의도적으로 살인한 권력 남용의 범죄자였다. 당시 제주여성은 출륙出陸 금지령으로 제주를 빠져나갈 수 없었다.

곤생이 신문고를 울려 조정은 곧 뜨거운 논의에 휩싸이게 되었다. 세 딸의 죽음보다 출륙出陸의 부당성에 초점을 맞춰 오히려 곤생을 범법자로 몰려는 자도 있었지만 그의 억울함에 공감하고 출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는 사람들 덕분에 제주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곤토진지로일본의 행정가. ‘곤토-진지로’<近藤晋二郞>는 제2대 제주도사島司.

그는 1919530일 이마무라-도모今村의 후임 도사 겸 제주경찰서장으로 발령되고 192335일 전출됐다.

그는 2년제이던 제주농업학교를 3년제로 승격시키고 또 4년제이던 제주보통학교를 6년제로 승격시켰고 각 면소재지에 공립보통학교의 개설을 서둘렀다.

곤토近藤 도사는 192110월 전년도 콜레라의 만연으로 위축된 도민을 위유慰諭하고 유연성을 발휘, 1920년에 제주소방서 개설, 또 제주도어업조합을 창설하고 읍면지부를 조직했다.

1921년 어용御用단체로 제주부인회를 조직했고 또 총독부 식산국의 산림출장소를, 1923년 제주측우소를 설치했다.

공사검孔士儉대정현감 및 제주판관. 1553(명종8) 12, 이흔李昕의 후임 대정현에 도임하고 1556(명종11) 8월 제주판관으로 승진해 떠났다.

1555(을미) 1556(병자) 왜변 당시에 전공을 세워 제주판관으로 승진했다.

1558(명종13) 2월에 신병으로 인해 떠났으며 1556년 여름 대정현감 재임 중 왜구를 격퇴한 전공으로 조정에서는 제주판관으로 승진시켰다.

즉 을묘왜변乙卯倭變 전후 왜구의 제주 침입이 자주 일어났는데 제주목사 김수문과 협력해 대승을 거두었다.

곽복산郭福山1911(일제강점기)~1971, 언론인. 제주신문사 편집국장. 호는 우당牛堂. 전라남도 목포 출신. 아버지 곽수천郭洙千과 어머니 김수경金洙卿의 장남.

19506·25 직전 제주신보는 서북청년단에 의해서 불법 점거당한 바 있었고 19511·4 후퇴로 다시 계엄령이 선포돼 만일의 사태로 부산의 피난 정부가 제주로 옮겨올 때에 대비했다.

제주지구 계엄사령부에서는 제주신보를 전국적인 신문으로 확대 개편하려고 했다.

그래서 계엄사에서는 신문사를 접수, 새로운 사장에 홍순재洪淳宰, 부사장에 김승문金勝文, 편집국장에 곽복산郭福山을 임명했다.

동년 219일 계엄령이 해제되고 원래의 사장 김석호金錫祜, 전무 신두방申斗玤에게 경영권이 환원되면서 동년 8월 그는 주필이 됐다.

곽복산은 유년 시절에 기독교계 사립 영신학교永信學校와 소성의숙小星義塾에서 보통교육을 받았다.

중학 과정은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통신강의록으로 독학했다.

20세에 일본으로 가서 도쿄물리학교東京物理學校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대학 정경과 2년을 수료한 뒤, 조지대학<上智大學> 신문학과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을 가기 전인 1927년에 어린 나이로 동아일보 지방 기자가 된 것을 인연으로 19354월 동아일보사에 들어가 사회부 기자로 일했다.

19418월 동아일보 폐간 뒤 생계를 위해 일본인이 경영하는 매일신보의 기자로 일했다.

광복과 함께 동아일보복간 준비위원이 되고, 194512월 복간되자 재차 입사해 광복 뒤 초대 사회부장이 되었다.

19474월 조선신문학원이 설립되자 초대 원장이 되었다.

6·25 때 제주신문의 주필이 되었고, 이후 19523월 동아일보에 세 번째 입사, 1개월간 편집국장 겸 논설위원을 지냈다.

1953년 서울 수복과 함께 신문학원은 신문보도과 외에 신문영어과·신문사진과를 신설, 기성 기자 재교육을 위한 신문기자 아카데미 강좌, 전국 지방기자 강좌 등을 실시하며 한국 언론계의 개척자로 활약했다.

한때 세계통신 고문, 중앙일보 주간, 합동통신 이사를 역임했다.

1955년 홍익대학 신문학과 교수를 거쳐, 195711월 문교부로부터 우리나라 최초로 신문학 교수 자격을 승인 받았으며, 1958년 중앙대학 신문방송학과 교수가 되었다.

1959년 한국신문학회 창립을 주도, 초대 회장이 되었으며, 1966년 한국신문연구소 이사와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심사위원 등을 지냈다.

1961년 서울특별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저서로 신문학개론新聞學槪論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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