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산기슭에 솟는 맑은 샘물이 지나가는 길손 반긴다
(97)산기슭에 솟는 맑은 샘물이 지나가는 길손 반긴다
  • 제주신보
  • 승인 2018.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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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은열 15세손, 부인은 전주 이씨…중훈대부 사재감에 이르러
꾀꼬리오름 북동쪽 묘역…후손들이 관리 잘해 정갈하게 정돈돼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 꾀꼬리오름 북동쪽 옛 보문사 터 기슭에 있는 남양홍씨 입도조 홍윤강 비석. 후손들이 관리를 잘 한 덕에 정갈하게 정돈돼 있다.
제주시 조천읍 대흘리 꾀꼬리오름 북동쪽 옛 보문사 터 기슭에 있는 남양홍씨 입도조 홍윤강 비석. 후손들이 관리를 잘 한 덕에 정갈하게 정돈돼 있다.

세상에 영원은 없다

세상에 형체 있는 사물로 태어나 다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이는 자연의 속성이 아닌가. 다하는 것, 즉 멸() 하는 것을 슬프다 한 것은 사람의 감정에서 비롯되었고 만물은 생멸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 또한 사람이 하는 말이다.

결국 우리에게 그 고통이란 같은 시간에 살다가 각자 다른 시간에 떠남을 의미하니 아마 익숙함이 사라져가는 아쉬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고통이란 인간이, 인간에 의한 인간적 고통인 것이다. 자연은 그냥 지나간다.

거친 바람을 그물로 잡을 수 없고 아름다운 새소리가 들리지만 그것의 모양을 알 수가 없다.

아름다운 것도 사람이 자연적으로 끌린 탓이다. 노자의 말처럼,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이 아름다운 줄로만 알지만 이는 보기 흉할 뿐이요, 착한 것이 착한 줄로만 알지만 이는 착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와 무()는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며, 길고 짧은 것은 서로 비교되며, 높고 낮음은 서로 바뀌고, 소리와 울림은 서로 어울리고, 앞과 뒤는 서로를 따른다. 왕필의 말대로. “아름다움이란 사람의 마음이 끌려 좋아하는 것이요. 추함이란 사람의 마음이 미워하고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아름답게 여기는 것과 추하게 여기는 것은 기뻐하고 성내는 것과 같고, 착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옳고 그름과 같다. 기뻐하고 성내는 것은 뿌리가 같고 옳고 그름은 문을 같이 하니 그러므로 한쪽만 들 수가 없다. 이 여섯 가지 모두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니 한쪽만 들 수 없는 수치()이다.”

여기에서 아름다움이란 사람의 마음이 끌려 좋아하는 것은 칸트가 말하는 미의 무관심성을 말하는 것으로 그 아름다움이란 이해관계 없는 편안함을 뜻하고 있다. 무심코 본 달이 저리 고울 수 있는 것에 마음 편하게 그것이 저절로 아름답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홍윤강의 6세손 홍우치의 화강석 문인석.
홍윤강의 6세손 홍우치의 화강석 문인석.

남양홍씨 입도조 홍윤강

사람이 혼자 살게 되면 부딪칠 이유가 있을까. 둘 이상이 모여 나눌 것이 생기면 위계가 생기고 욕심이 생겨 높고 낮음을 따지기 시작하고 서로의 위치가 바뀌기도 한다.

우리는 이 관계를 정치라고 하고, 그 관계의 힘을 권력이라고 한다. 권력은 주어지기도 하지만 만들어지기도 한다.

결국 정치는 민심을 따르게 되면 아름다워지고, 민심을 거스르면 흉하게 된다.

민심을 따르는 것은 공동체의 평안을 구가하는 것이고 민심을 거스르는 것은 민중의 기본 욕망에 반하는 것이다. 바른 정치를 펴기 위해 관자에서는 어떤 사람을 아주 좋아해도 사사로이 이롭게 해서는 안 되고, 어떤 사람을 아주 미워해도 사사로이 해롭게 해서는 안 된다.”라고 했다.

남양홍씨 홍효손의 묘역은 꾀꼬리오름 북동쪽 나지막한 옛 보문사 터 기슭에 있다. 이곳은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도, 보문사(普門寺)로 기록돼 있는데, “거구리악(巨口里岳) 북쪽에 있다고 했다.

고려 시대 승() 혜일(慧日)이 당시 보문사의 전경을 잘 묘사하고 있다. “절은 황량하고 외진 곳에 의지했는데 단 샘물은 꿈속에서 얻은 듯 연꽃 핀 가람 아름답기만 하네. 부처의 법 잇는 풍습 있고 풀은 서리를 맞고도 그대로 푸르러 이곳에선 담쟁이마저 붉지 못하네. 원통문(圓通門)은 자연스레 열려있고, 먼 곳의 기러기 긴 하늘을 울며 날아가네

지금도 보문사 터 주변에서는 청자, 분청의 사금파리들이 널려있다.

예로부터 산기슭에 숨은 듯 솟는 맑은 샘물이 오늘도 지나가는 길손을 반기고 있다.

남양홍씨 묘역은 후손들이 관리를 잘 한 덕에 정갈하게 정돈돼 있다.

오름 능선 맨 우측으로 비석들이 즐비한데 그중 한 기가 남양홍씨 제주 입도조인 홍윤강(洪允康)의 비석으로 20세손 만농 홍정표 선생이 적었다.

홍윤강은 시조 홍은열(洪殷悅)15세손으로 문정공(文正公) 홍언박(洪彦博)의 손자이고,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역임한 홍사원(洪師瑗)의 아들이다.

홍윤강은 고려의 명문 가문으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해 벼슬이 중훈대부 사재감(中訓大夫 司宰監)에 이르렀다.

홍윤강의 부인은 전주 이씨로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3자 이방의(李芳毅)의 딸이다.

잘 나가던 고려 명문 집안이 비극의 검은 구름에 쌓이게 된 것은 때 아닌 소나기와 같은 역모에 휘말린 사건 때문이었다.

공민왕 23(1374) 9월 홍씨 집안의 홍륜(洪倫)은 최만생의 공민왕 시해사건에 연루되면서 그야말로 고난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최만생과 함께 홍륜(홍사우의 아들)과 홍관(홍사진의 아들) 등이 처형되고 홍윤강의 삼촌으로 아버지의 형제인 홍사진(洪師晉), 홍사우(洪師禹)가 유배된다. 당시 사재감이었던 홍윤강은 명덕태후가 홍씨 집안의 어른이었기 때문에 방계였던 홍사원의 집안은 멸문지화만은 간신히 면했으나, 나날이 불안한 세월을 견딜 수가 없어서 홍윤강을 비롯한 중강(仲康), 계강(季康), 숙강(叔康) 4형제는 숨을 곳을 찾아 전국으로 기약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제주선현지濟州先賢誌)

공민왕 시해사건은 대체로 그 군주 자신의 행실을 바르게 하지 못한 원인이 컸다.

고려사절요, 몽골의 사신이 당시 공민왕에 대한 기록을 참고해 보면 공민왕 시해 사건의 시말(始末)을 쉽게 감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을 적에는 총명하고 인후하여 백성의 마음이 모두 그에게 쏠렸었다. 왕위에 올라 정성을 다하여 정치에 힘쓰므로 조정과 민간에서 크게 기뻐하여 태평시대가 오기를 기대했는데, 노국공주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지나치게 슬퍼하여 본심을 잃고 신돈에게 정사를 맡겨 공신과 현인을 내쫓고 죽였다. 그리고 토목의 역사(役事)를 크게 일으켜 백성의 원망을 사고 못된 젊은 아이들을 가까이 하여 음란한 행동을 방자히 하며, 무시로 술 주정을 부리며 측근 신하를 구타하였다. 또 후사가 없음을 걱정하여 다른 사람의 아들을 데려다가 책봉하여 대군으로 삼았다. 외인이 이를 믿지 않을까 염려하여 비밀히 폐신(嬖臣)으로 하여금 후궁과 관계하여 더럽히게 하였으며, 후궁이 임신하게 되자 관계한 그 사람을 죽여 입을 막으려 하였으니 패란(悖亂) 함이 이와 같은데 화를 면할 수가 있었겠는가?”

 

군주란 지혜로움이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이 흥성한 뒤에는 반드시 쇠락하기 때문이다.

높이 올라갈수록 큰 바람을 맞을 것이고, 몸을 낮출수록 사람들이 많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순한 사람도 작은 권력이 손에 쥐어지면 급변하는데 표독(慓毒) 해지고 경우(境遇) 없이 행동하기 일쑤다.

하물며 군주라면, 쉽게 감정에 치우치지 말아야 하는데 관자의 말대로 아첨하는 사람을 찾지 말고, 아양 떠는 사람을 기르지 말고, 거짓말하는 사람을 참모로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을 쓰는 데 표준이 없으면 나라가 크다고 할지라도 장차 망하고 말 것이다.” 공민왕의 성과도 있었으나 고려의 최후가 이렇다.

홍윤강은 입도 당시 아들 천보(天寶), 손자(明道), 증손 처의(處義), 처지(處智)와 함께 왔는데 처의 아들 효손(孝孫)과 처지의 아들 중() 등이 제주에 그대로 남아 오늘의 남양홍씨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홍윤강은 입도 후 2년이 되는 해인 태종 2(1404)에 서울로 갔고, 현재 홍윤강의 5세손 홍효손의 묘와 6세손 홍우치의 묘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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