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다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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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건, 제주특별자치도 사회복지협의회 사무국장

그야말로 좌충우돌하며 장애인복지현장에서 일하던 때 일이다. 제주지역 여성장애인들을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장애인복지 분야에서는 나름 이름 있는 강사를 모시게 되었다. 그분은 휠체어를 이용하는 여성장애인이었다. 이름난 분이었던 탓에 이참에 좋은 인연을 쌓고 싶은 욕심도 품었다.

그분이 공항에 도착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교육장소로 이동해 교육을 마치기까지 종일 그분 옆에 붙어 있다시피 했다. 마지막 일정인 저녁식사 자리. 나는 그분 앞에 앉아 못 다한 얘기를 나누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분은 정색하며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아까 공항에서는 굉장히 불쾌했어요.” 순간 당황스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곰곰이 생각해도 도무지 그분이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기회를 보다가 자리가 끝나가기 전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알려 달라고 사정하듯 매달렸다. 그분은 공항에서 첫 인사를 나누었을 뿐인 누군가가 아무런 사전 양해 없이 당연하다는 듯 자신을 덥석 안아 차에 태우는 데 깜짝 놀랐다고 한다. 아무리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장애인이지만 자신의 의사를 확인하지 않은 점에 몹시 마음이 상했다는 것이다. 순간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더라도 ‘선의’로 한 행동이었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하기 조차 민망한 기억이다.

비슷한 경우는 적지 않다. 불우이웃에게 성금을 전달한다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성금을 전달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경우는 흔하디흔하다. TV광고를 통해 굶주림에 시달리는 어린이를 돕자며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동들을 클로즈업하거나 희귀병에 걸린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모금을 유도하는 이른바 ‘빈곤 포르노’도 그렇다. 한때 전화 한 통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청자의 눈물샘을 자극했던 ‘사랑의 리퀘스트’도 마찬가지다. 남을 위한다지만 결국 자기만족을 위한 ‘선의’를 강요하는 경우들이다. 엊그제 추석 연휴 때도 그러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만나게 된 친지들이 분명 ‘선의’로 던진 결혼과 출산, 진학과 취업에 관련된 물음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선의’는 반드시 ‘선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저서 <냉정한 이타주의>로 많이 알려진 영국 옥스퍼드대학 철학과 교수인 윌리엄 매캐스킬은 개발도상국에서의 노동착취를 근절하기 위해 해당 상품의 불매운동을 하는 것은 그마저도 좋은 일자리를 빼앗는 결과를 낳는다고 했다. 커피 생산자의 이익을 위해 공정무역 커피를 구매하며 소비자가 추가로 지불한 금액 중 정작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비율은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냉정하고 효율적이지 못한 ‘선의’는 오히려 피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유례없는 폭염에 시달리다 어느덧 찬 기운마저 느끼는 시기가 되었다. 곧 닥칠 추위에 앞서 선한 뜻을 담은 움직임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활발하게 일어날 것이다. 서로 돕고 나누는 문화가 우리 일상에 자리 잡은 결과이다. 이제는 이런 문화를 보다 성숙하게 발전시켜야 할 때이다. 혹시나 그동안 내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자기만족을 위한 선의를 베풀었다면 이제는 상대의 입장을 보다 더 헤아릴 줄 아는 선의를 실천하면서 말이다. 그럴 때 비로소 선행으로 이어지는 값진 선의가 빛을 발할 것이다. ‘선의’는 동정이 아닌 공감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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