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로 피어날 목련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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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곤 수필가

아직은 날씨가 차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움츠린 몸으로 거울 앞에 섰다. 낯선 사내의 슬픈 눈이 보였다. 늘 보는 얼굴인데도 가끔씩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탄력을 잃어가는 피부에 옅은 갈색의 검버섯 몇 개가 세월을 짐작하게 한다. 산만한 머리는 모자가 가려주고 있어 다행이었다. 며칠 동안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수염이 무성하다.

거울에 비친 눈이 더없이 쓸쓸해 보였다. 빛을 잃은 듯 흐릿했다. 옛날에는 안 그랬는데. 사람들은 총기있는 눈이라고 했다. 눈이 특별히 매력적이라는 말도 들었다. 별 생각 없이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으면 곁에서 뭘 그렇게 골똘하게 생각하느냐고 물어보았다. 누군가를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그는 갑자기 허둥거리면서 눈길을 피하려고 했다. 혹시 지나가는 아가씨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흠칫 놀라며 종종걸음으로 달아났다. 가끔씩은 그녀들의 얼굴에 어리는 홍조를 느낄 때도 있었다. 사람들이 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어 도리어 무안해졌다. 지금도 알 수 없다. 그들은 왜 그랬을까.

정말 오래전의 일이다. 친구는 서구의 유명한 남자 배우와 비교하기도 했다. 그 배우는 눈빛이 매우 강렬해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훔쳤다. 누군가를, 혹은 무엇을 응시하는 그 눈빛으로 내면의 연기를 표현했다. 정말 그럴까. 그 배우와 나는 전혀 닮은꼴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 눈은 반짝임이 아니라 멍한, 텅 비어 있는, 우수어린, 이런 표현이 적당했으리라.

옛날,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심심할 때면 노트 한 귀퉁이에 낙서를 했다. 그때 눈을 자주 그렸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거울에 비친 내 눈을 그렸던 것 같다. 아래 위와 좌우가 균형이 잡히지 않은 길쭉한 눈에 눈동자를 그려 넣었다. 반복적으로 그린 것으로 보아 분명히 내면을 표현하고자 하는 무의식적인 욕구가 있었으리라. 심리학을 전공하고 있던 친구가 무엇이라고 말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달리 생각하면, 사람들이 내 눈에 관심을 보였기 때문에 그랬을 지도 모른다.

잠을 설친 어느 아침 거울 앞에서 살펴보았다. 한쪽 눈은 쌍꺼풀이 깊게 패였고 다른 쪽은 반쯤 되다 말았다. 사람의 눈을 관찰할 때 붕어형, 잉어형, 반달형, 버들잎형 등이 있다면 내 눈은 옥돔형에 가깝다고 보면 될까. 그것도 좌우가 대칭을 잃어버렸으니. 그래서 눈이 못생겼다는 생각을 하면서 친구들의 균형 잡힌 눈을 부러워했다. 꼭 특징을 찾으라면 좁은 이마에 비해서 커 보이는 눈이 안으로 약간 들어간 편이다.

아침의 거울에 비친 눈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을까. 그 슬픈 사내의 표정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을까. 머리와 수염이 희끗하기는 하지만 아직 노인은 아니다. 젊었다고 말하기에는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듯 보였다. 머리가 숭숭 빠지기는 했지만 완전한 대머리도 아니다. 이런 모습이야 가꾸지 않아서 그랬다고 웃으며 넘길 수도 있다.

그런데 눈빛이 탁해 보였다. 옛날의 총기는 어디로 갔을까. 사람들의 영혼이라도 빨아들일 것만 같았던 깊은 호수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편하지 않았던 세월의 무게가 고스란히 맺힌 것일까. 아니면 보지 않았어야 할 세속의 온갖 오물들이 겹겹이 쌓인 것일까. 맑음을 잃어버린 내면의 영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으로 혼란스러웠다. 지금의 내 눈은 이제까지 살아온 삶의 응축이요 내면의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호기심 가득한 어린아이의 눈이 그립다. 총천연색의 꿈에서 깨어나 아침 햇살을 보는 청년의 눈이 그립다. 그렁그렁 고인 눈물로 기도하는 순수한 영혼의 눈이 그립다. 어디 그뿐일까. 미켈란젤로가 끝내 완성하지 못했던 피에타 조각상, 어머니 마리아의 눈이 그립다.

눈을 씻을 수 있는 맑은 옹달샘은 어디에 있을까. 마음을 씻을 수 있는 순수의 깊은 샘은 어디에 있을까. 훗날 인생을 결산할 때 하늘 그분은 무한의 깊은 눈으로 내 눈을 응시할 것만 같다. 견딜 수 있을까. 그분 앞에서 한 순간의 혼불로 피어나는 하얀 목련이 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한라산에는 눈이 쌓였다. 눈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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