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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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혁, 시인·문화평론가

시월 초순 찾아든 서울 혜화아트센터에서는 <살어리 살어리랏다-탐라-김미령展>이 열렸다. 마지막 날에야 찾은 나에게 화가 김미령은 내 고향 제주의 참 면모를 온전하게 보여주고 들려주는 스토리텔러였다. 두껍게 바른 물감 너머에 돌, 꽃, 바람, 그리고 숱한 영혼이 웅숭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유화는 푸르스름한 제주의 새벽 별빛들처럼 빛났다. 그의 표현처럼 그것들은 ‘제주의 질감’ 자체였다.

그는 <천지창조>, <천지인> 그림 앞에서 말했다. 제주는 한라산이다. 하늘의 빛을 온전하게 땅이 받아들여 흙·돌·나무·동물·사람들이라는 온갖 꽃을 피워낸다. 해바라기가 태양을 갈구하듯, 메마른 바위가 단비를 기다리듯, 모든 것은 사랑을 찾고 사랑을 주며 천지가 꽃으로 피어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화엄법계(華嚴法界)가 떠오른다. “산과 물, 그리고 대지, 밝음과 어둠, 색상과 허공이 모두 미묘한 체[妙體]를 나타내는 것이요, 생사와 열반, 보리와 번뇌 모두가 미묘한 용[妙用]이어서 낱낱이 두루 가득하다. 그래서 취해서 가질 것도 없고 내다버릴 것도 없으며, 모자람도 없고, 남음도 없는 것이다.”(김시습, 『연경별찬』)

온갖 생명들이 서로에게 생명을 주고, 사랑을 나누며 혼연일체가 되어 살아가는 세상. 그것이 그가 말하는 ‘살어리 살어리랏다’의 세상이고, 제주가 그것을 온전히 담고 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영실기암이며 선돌, 폭포를 품은 기암절벽 따위의 돌을 즐겨 그린다. 그런데 그 돌들은 메마르지 않다. 거칠고 단단하고 메마른 듯 보이는 그 속에 물기를 머금은 이끼가 자라며 새로운 생명을 틔워낸다. 그것은 겨우내 나목으로 단단히 휘두르고 있던 수피(樹皮)를 뚫고 연분홍 벚꽃을 피워 올리는 것과 같은 세계다. <뒤안길>, <삶3>에 등장하는 고사리 꺾는 제주 어머니들이 전쟁과 가난의 모진 삶도 기꺼이 이겨내며 자식들을 길러냈던 삶과 다를 바가 없다고 그는 말한다. 서른 즈음에 시작된 갈색, 황토색에 대한 강렬한 끌림 너머 이제는 그와 같은 깨달음에서 자색(紫色)이 많은 그림들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바람’을 이야기했다. ‘새별 오름’ 앞의 억새밭을 수놓는 바람, 푸른 보리밭에 나타난 바람, 온갖 바람은 제주의 영혼이 되어 흐르고 있음을 말했다. 그 바람과 함께하는 안개와 구름 등은 모두 물이요, 메마른 돌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영혼이다. 그의 그림 어디에도 바람이 흐르지 않는 데가 없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바람’이 있는데 그게 무언지를 내게 물었다. 그건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는 것을 ‘바람’이라고 하듯, 우리의 소망과 꿈, 희망 같은 것이란다. ‘바람’ 없는 제주가 없고, ‘바람’ 없는 삶은 시든 삶이다.

김미령이 붙든 돌, 흙, 물, 바람, 사랑 등은 제주의 질감이 되어 정말 제주다운 것이 무엇인가를 웅변하고 있었다. 우리가 지켜야 할 제주가 이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글날 재경제주도민체육대회에 참석했던 원희룡 도지사도 지금 제주의 난개발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고 했다. 잘 풀어야 한다. 김미령의 작품처럼 ‘제주의 질감’을 살려낼 길을 찾아 온전한 생명이 반짝이며 살게 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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